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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에서 <필립 모리스>를 보고 나와 뜬금없는 의심에 휩싸였다. "이건 실화다, 진짜다"라는 포스터 홍보 문구에 대한 의심. 그러니까 이게 과연 진짜 실화일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실화 여부에 대한 의심이 든 이유는, 주인공의 기상천외한 사기행각이 도무지 실화라곤 믿겨지지 않을정도로 기가 막힐 뿐더러, 짐 캐리 특유의 익살스러운 캐릭터 묘사가 사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너무나 허무맹랑한데다 특히 후반부의 대반전에 다다르니, 이 영화가 실화라는 홍보 역시 낯두꺼운 '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왠지 존 레쿼와 글렌 피카라 두 감독이 "용용 죽겠지"하고 낄낄대고 있을 것 같은.

그러나 의심은 몇 분 간의 웹 서핑을 통해 금세 풀렸다. 이 영화, 실화 맞다. 1990년대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대담한 사기와 탈옥을 감행했다가 144년 형을 선고 받은 실존 인물의 삶을, 저널리스트 스티브 맥비커가 책으로 썼고, 두 감독이 책을 바탕으로 3년간의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 영화화한 게 <필립 모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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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스티븐 러셀. '탈출의 명수(Houdini)', '사기의 왕(King Con)'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닌다.

영화에 소재를 제공한 스티븐 러셀이라는 사람은 IQ가 160이 넘고, 실제 여러 목소리를 낼 줄 알며, 그를 만나본 이들을 금세 매료시키고 마는 마력을 지녔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캐릭터와 파란만장한 삶 자체가 더 없이 좋은 영화적 소재라고 판단하고도 남음이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캐릭터든 자기화하고 마는 짐 캐리의 아우라에 힘입어 주인공의 사기 행각과 러브 스토리를 조금 엉뚱한 호흡으로 펼쳐 나가는 영화는, 한편으로 왠지 묘한 함의를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치 없게도, 나는 영화 말미에 이르서야 그 함의의 정체를 살짝 가늠할 수 있었다. 스티븐 러셀이 144년형을 선고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점에 친절하게도, 혹은 뜬금 없게도 당시 택사스 주지사였던 조지 부시의 이름을 언급하는 자막이 나오는 대목에서다. 

그러고 보니, 게이 로맨스와 사기 행각 이면에 미국 주류 사회에 대한 어떤 조롱의 메시지 같은 게 슬쩍 묻어나오는 것 같았는데 스티븐 러셀의 삶 속에 포함된 요소들을 뽑아보니 대충의 윤곽이 나오는 것도 같다. 요컨대 이거다.

1. 그는 성실한 가장이었지만 게이로서의 삶을 선택한다.(성실한 가부장 vs. 게이)
2. 그는 전직 경찰이었지만 천재 사기꾼이 된다.(경찰 vs. 사기꾼)
3. 그는 민간 의료 보험회사의 중역으로 위장 취업해 거액을 횡령한다.(민간 의료보험에 대한 응징)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사기는 욕망이 만든 틈새를 파고들기 마련이다. 역시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던 <캐치 미 이프 유캔>(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2002)의 프랭크처럼, 스티븐 러셀이라는 인물은 철옹성처럼 견고해보이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성곽에 패여있는 작은 허점을 발견하고, 그 허점을 파고드는 사기 행각으로 일종의 폭로를 수행한 셈이다.

여기에 성실한 기독교적 가부장이자 전직 경찰 출신의 게이 사기꾼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미국의 보수적 가치에 편승하려던 삶으로부터 그가 과감히 탈출했음을 의미한다. 필립 모리스와의 로맨스와 그 로맨스를 지키기 위한 그의 모든 사기 행각은, 그러므로 정의를 사칭해 약자를 유린하는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복수극이자 일종의 똥침과도 같아 보이는 셈이다. 그래서 보란듯이 호모포비아를 능멸하는 동성애 장면도, 야오이적 눈요기로만 비쳐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명백한 범죄자 스티븐 러셀이 무슨 개혁의 기치를 내건 혁명 전사가 아니었던만큼, 이건 순전히 그의 삶에 대한 의미 부여의 차원일 뿐이다. 인물의 삶이 시대의 맥락 안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면, 그에게 주목한 두 감독은, 모두가 답답해 하되 감히 뚫지 못하는 시스템의 벽을 가볍게 유린한 그의 삶 안에서 어떤 대리적 해방감을 추출해 내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 <필립 모리스>는 그 작업을 꽤나 성공적으로 수행한 작품이다.

짐 캐리와 이완 맥그리거는 지난 2월 프랑스 문화훈장을 수상한 자리에서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조차 결코 나올 수 없는) 키스 세레모니를 선보였다. 두 배우가 합작한 명불허전의 게이 열연을 놓치지 마시라.

트위터: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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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나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어제 봤습니ㅏㄷ. 재밌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영화더군요. 어렸을 적 엄마에게 버림 받은 스티븐이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는....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게 하려고 애쓰는 그런 부분들이 영화를 본 다음날인 오늘 더 슬프게 느껴지네요. 스티븐이 잡혀서 경찰차 타고 갈 때 필립의 인슐린주사기를 마구 몸에 찌를 때도 참 슬펐어요. 근데 블로거님 혹시 그 때 흐르던 음악 제목 아시는가요?? take a ribon on my hair...로 시작되는 여자가수의 노래인데 제가 이 노래 들을 때마다 제목이 생각이 안 나서 참 답답해요.

    2010.07.03 16:26
    • cinemAgora  수정/삭제

      Tammy Wynette이 부른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0.07.03 16:42
  2. 안나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10년 전부터 이 노래 제목 알고 싶어서 음악 사이트 에서 검색했어도 못 찾았는데 단방에 알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2010.07.03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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