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에서 지방선거를 곱씹다

별별 이야기 2010. 6. 4. 11:27 Posted by cinemAgora
서울 도심에서 내가 사는 일산으로 오는 직행 버스가 있다. 버스는 광화문 네거리와 남대문, 그리고 서울역에서 정차한 뒤 연세대와 수색을 거쳐 일산으로 달린다. 낮에야 대부분 자리가 있지만 퇴근 시간에는 사정이 다르다. 자칫 하면 꼬박 흔들리는 버스 안에 서서 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래서 나름 머리를 써서 한 두 정거장을 거슬러 올라가 탈 때도 있다. 물론, 앉아 가기 위해서다.

한동안 여러 정류장에서 이 버스를 이용하다 보니 꽤 흥미로운 상황을 보게 됐다. 공식적인 종점이자 시발점은 서울역이지만 도심 내 사실상의 첫 정류장이랄 수 있는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승객들이 따로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버스가 오면 우왕좌왕 뛰어 다니는 풍경이 연출되기 일쑤다.

그런데 한 정거장 뒤인 남대문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승객들이 같은 버스를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다음 정거장인 서울역에서는 아무도 줄을 서지 않는다. 평소에는 그저 스쳐지나갔던 풍경인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같은 버스인데, 정류장마다 왜 이렇게 다른 현상이 벌어질까. 남대문에서는 줄을 서야 한다고 누가 가이드라도 하는 것일까.

곰곰히 따져 본 뒤, 나는 이것이 기회의 획득 가능성과 관련이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쉽게 말해 앉아 갈 수 있는 기회가 어느 정도 주어지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앉아갈 확률이 높다. 물론 여기서도 자리가 다 들어차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조금만 민첩하게 움직이면 서서 가는 불운을 피할 수 있다. 그러니 줄 따위는 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정거장 뒤의 사정은 다르다. 광화문에서 이미 자리가 거의 다 들어찼다면 남은 자리는 얼마 안된다. 이걸 두고 승객들이 이전투구를 해봤자 별 실익이 없을 뿐더러 그 모습 또한 볼썽 사나울 게 뻔한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줄을 서서 희소한 기회라도 균등하게 나누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 반면 세번째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지 않는 것은, 이미 기회가 거의 없을 터이니 어쩌다 운이 좋으면 앉자는, 자포자기가 깔려 있기 때문일 테고.  

뜬금없이 버스 정류장의 풍경 얘기를 꺼낸 것은 제 5회 동시지방선거의 결과 때문이다. 알다시피 서울이나 경기 모두 단체장은 한나라당, 즉 보수 성향의 후보들이 이겼다. 그러나 두 지역 모두 교육감 선거에서만큼은 유권자들이 진보 성향 후보들의 손을 들어웠다. 어쩌면 상호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이 결과를 과연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묘하게도 앞서 말한 버스 정류장의 상반된 풍경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를테면 진보 성향이 이긴 교육감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두번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기회가 있되, 희소한 상황 말이다.

자녀들을 명문대 입학의 바늘 구멍을 향한 정글 속에 내보내 놓고, 조금이나마 행동 빠르고 영민하게 움직인다면 그 희소한 기회가 내 자식에게도 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사교육비에 허리가 휘고 돈 많은 부모의 자녀들이 더 유리한 상황이 심화되면서 좌절로 변해갔다.

이제 학부모와 학생들 모두를 입시 기계로 전락시키는 이 미친 질주를 누군가 멈춰 주기를 바라는, 그 절박한 심정이 '무한 경쟁을 멈추고 교육의 공공성을 바로 세우자'는 심리로 연결된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내 아이에게도 줄을 서서 기다리면 기회가 오도록 하자는 심리.

이런 반면, 분명 변화의 조짐이 보이긴 했지만, 단체장 선거에서 서울과 경기의 선택은 '현상유지'였다. 여러 복잡한 변수들을 제외하고 선거 결과를 최대한 단순화해 본다면, 여전히 복지와 분배보다 개발과 성장, 공공성보다 자유 경쟁의 논리가 우선해야 한다는 믿음이 우세하다는 방증이다.

달리 말해 유권자들은 "그래도 나한테는 앉을 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여유로운 심정으로 첫번째 정류장에 서 있거나, "어차피 못앉을지라도 운 좋으면 한 자리 걸리겠지"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세번째 정류장에 서 있는 셈이다.
 
유독 오세훈 시장에게 몰표를 안겨준 강남 3구민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이 첫번째 정류장의 그것일 것이다. 씁쓸한 것은, 세번째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심정이 첫번째 정류장과 똑같은 현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서서 가야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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