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은 현재의 시각에 의해 끊임없이 재평가된다. 5.16 군사 정변도 그 당사자들에 의해 '혁명'으로 추앙될 때가 있었고, 5.18 민주화운동도 당대 정권에 의해 '폭동'으로 격하될 때가 있었듯이 어떤 입장과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똑같은 사건의 의미나 평가가 천양지차가 나기 마련이다.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영화가 그 상처를 다루는 방식이 시대마다 사뭇 달랐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의 영화에는 한국군과 인민군의 대결이 단골 손님이었다. 그리고 이들 영화 속의 한국군은 호국영웅으로, 인민군은 당연하게도 잔혹무도한 악한으로 묘사됐다. 70년대에는 반공영화를 한 편 만들어야 외화 수입이 허용되는, 지금으로선 참 해괴해 보이는 제도까지 있었다.

반공의 기치 아래 대결적 태도로 일관하던 한국 전쟁 영화의 흐름이 슬쩍 바뀌기 시작한 건 문민정부가 들어선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박광수 감독이 만든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는 순박한 섬사람들이 이념의 희생물로 전락하는 살풍경을 보여주며 전쟁 그 자체의 비인간성을 드러냈다.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1998)은 남북의 대결이 아닌 오히려 남한의 우방 미군이 남겨 놓은 전쟁의 상처에 초점을 맞췄다.

요컨대, 이념적 대결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생긴 분단의 상처와 현재진행형의 아픔에 주목하는 흐름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한국전쟁을 형제가 총부리를 겨누게 만든 비극으로 다룬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2002)나, 비록 전쟁영화는 아니지만 <공동경비구역 JSA>(2000)와 최근 영화 <의형제>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만들어진 <포화 속으로>가 있다. 이 영화는 앞서 말한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에서 비껴나 있다. 비껴나 있다는 표현을 쓴 것은, 한국전쟁과 분단을 바라보는 입장과 태도가 최근에 봐왔던 영화들과 또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포항여중에 배치된 학도병들의 희생을 담아낸 이 작품은, 물론 실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긴 하되, 그 채택된 설정 자체에서부터, 이를테면 미군의 노근리 학살을 담아 얼마전에 힘겹게 개봉한 <작은 연못>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굳이 설명하면 70년대 영화의 시각에 더 가깝고, 좀 냉혹하게 말하면 돈을 들여 전투신을 공들여 만든, 비싼 정훈 교육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게 한다.
 
물론 영화는 그 와중에도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 흔적을 엿보인다. "인민군이 뿔 달린 괴물인 줄 알았는데, 그들도 똑같이 어머니를 찾더라"는 학도병 리더 오장범의 독백은, 혹시라도 이 영화가 반공영화로 비쳐질까 두려워 슬쩍 집어 넣은 어정쩡한 제스처로 보인다. 하지만 그 밖에는 예의 반공영화의 상투적 장열함 그대로다.

수도 없이 몰려드는 인민군. 절규하며 총을 쏘다 장엄하게 죽어가는 어린 학생들. 그리고 그들의 영웅적 활약 앞에 푹푹 쓰러지는 인민군들은 사람이 아닌 게임 캐릭터들마냥 겹겹이 쌓인다. 특수효과는 현란하고 죽음은 스펙터클하다. 당연하게도, 한국군 장교(김승우)는 다정하며 의리 있고 인민군 장교(차승원)는 냉정하고 잔혹하다.

어떤 제스처를 취하더라도 이 영화는 결국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마다 않은 젊은 넋의 산화'라는 컨셉트를 중심에 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영웅적 희생의 스펙터클에는 어떤 순간에도 모자 각도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T.O.P와 권상우를 뺀 나머지 학도병, 그 개개인의 사연이 끼어들 틈이 없다. 고로 왜 이처럼 어린 학생들이 이념 전쟁 앞에서 그토록 허망하게 죽어갔는지에 대한 안타까운 성찰 역시 언감생심이다.

<포화 속으로>는, 이 시대에 이 정도 전쟁 영화면 됐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또 세상이 바뀌었다고 친절하게 일러주는 것도 같다. 전쟁이 비극이라고 말하는 건 대동소이하지만 이 영화엔 왠지 씁쓸한 퇴행의 흔적이 엿보인다. 천안함 사태와 그로 말미암은 전쟁 위협을 통과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분단의 사슬 안에서는, 세상도 영화도 이렇게 도돌이표가 되는 것인가.

트위터: @cinemagora

,
BLOG main image
3 M 興 業 (흥 UP)
영화, 음악, 방송 등 대중 문화의 틀로 세상 보기, 무해한 편견과 유익한 욕망의 해방구
by cinemAgora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187)
찌질스(zzizzls) (3)
영화 이야기 (702)
음악 이야기 (34)
TV 이야기 (29)
별별 이야기 (122)
사람 이야기 (13)
3M 푸로덕숀 (156)
애경's 3M+1W (52)
민섭's 3M+α (27)
늙은소's 다락방 (26)
라디오걸's 통신소 (1)
진영's 연예백과사전 (4)
순탁's 뮤직라이프 (10)
수빈's 감성홀 (8)

달력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NM Media textcube get rss DNS Powered by DNSEver.com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3 M 興 業 (흥 UP)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cinemAgora [ http://www.ringblog.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티엔엠미디어 DesignMyself!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