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나이에 아이돌을 좋아한다면, 그것도 빅뱅이나 2PM, 소녀시대나 원더걸스, 카라 처럼 잘 나가는 한국의 아이돌/걸그룹이 아니라 일본 아이돌을 좋아한다면 웃을 분도 계실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 아이돌 그룹은 5인조 '아라시'다.

그들의 음악적 퍼포먼스는 사실 굉장한 수준은 아니다. 별 화음도 없이 주로 단음 합창을 하는데다 춤 솜씨나 무대 매너 역시 한국의 재능 넘치는 아이돌을 압도할 만한 정도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조카뻘의 이 녀석들을 "예뻐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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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오노 사토시, 니노미야 카즈나리, 마츠모토 준, 사쿠라이 쇼, 아이바 마사키


우선 '아라시'는, 조변석개하는 쇼비지니스 세계에서 같은 멤버로 10년 이상을 버티며 최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수 아이돌이다. 물론 기무라 타쿠야가 속한 'SMAP'처럼 정상의 자리에서 오래 가는 아이돌 그룹이 비단 아라시 뿐만은 아니다. 또 그 뒤에 일본 최강의 연예기획사인 '쟈니스'의 후광 효과가 작용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 그룹이 장수하는 데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멤버들의 개성이 화학적 융화작용을 일으키는 그들만의 독특한 '인화(人和)'다. 그리고 이건 비단 아이돌로서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일상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이들이 셋만 모여도 쉽게 권력 관계로 변질돼 결국 불화를 일으키고 마는, 그래서 결국 단명으로 끝나거나 유효 기간이 길지 않은 그룹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있는 비결을, 어쭙잖게 분석해 보자면 이렇다. 먼저 멤버들의 캐릭터 조합이 기가 막히다. 하나 하나 다른 성격을 지닌데다 장기도 각각 다르다.

노래와 춤이 발군인 오노 사토시, 연기에 일가견이 있는 니노미야 카즈나리, 멤버중 가장 가방끈이 긴 래퍼 사쿠라이 쇼, 약간 모자란 듯 귀여운 구석이 돋보이는 아이바 마사키, 그리고 막내이면서도 팀을 가장 살뜰하게 챙기는 마츠모토 준 등은 드라마와 영화, 연극, 심지어 뉴스 프로그램 등 각자의 특장점을 살린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서도 함께 모인 와중에서는 사이 좋은 십대 소년들처럼 천진난만하게 논다. 이런 과정을 통해 멤버 각자의 뚜렷한 개성을 각인시키고, 또 그 개성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내는지를 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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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멤버들 간의 균형점을 잡는 데 있어서 리더 오노 사토시의 역할이 크다. 이 친구는 멤버들 가운데 노래와 춤 솜씨가 가장 발군이다. 그래서 콘서트 때마다 그의 리딩 가창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로 다른 멤버들이 뛰고 달리며 분위기를 돋운다.

하지만 성격은 가장 태평하고, 때로는 리더가 아닌 듯 모자란 구석을 내비친다. 틈만 나면 낚시를 하러 가고 싶어 버라이어티 출연 때마다 심드렁한 표정을 짓기 일쑤다. 살을 태우지 말라는 사무소의 명령에도 바다 낚시를 다녀와 시커멓게 탄 피부로 돌아오는 반항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다. 낚시 금지령을 내리면 만사가 귀찮다는 듯 태업을 한다.

멤버들은 리더의 역할을 확실히 존중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그 치기와 태평함을 힐난하며 유희를 찾아낸다. 한마디로 오노 사토시는 무대 위에선 안정된 퍼포먼스로 리더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가운데서도 무대 뒤에선 전혀 권위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친화력을 이끌어내는 인물인 셈이다. 리더가 흔쾌히 놀림의 대상이 되는 순간, 팀은 즐겁고 유쾌해지며 무엇보다 평화로와 진다. 왠지 그런 리더가 갖고 싶어진다.

멤버들 가운데 마츠모토 준 다음으로 나이가 어린 니노미야는 맏형인 오노 사토시를 골려 먹는 대표주자다. 오노 사토시 뿐 아니라, 그는 멤버들을 구박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하지만 그 촌철살인의 구박은 언제나 귀여운 영역 안에 있어 폭소를 자아낸다.

99년 그룹 결성 당시 가장 마지막에 합류했다는 아이바는 자신의 수행력이 가장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이 그룹 안에 속해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역할도 꽤 중요하지만 왠지 신세지는 듯한 미안함 같은 정서가 그에게 느껴진다. 다른 멤버들이 그런 그를 한편으로 약올리고 한편으로는 살뜰하게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명문 게이오대 출신의 사쿠라이 쇼와 '폼생폼사' 마츠모토 준은 준수하고 세련된 매너로 자칫 배가 산으로 올라갈 위험을 견제한다. 그러면서도 역시 그 이유 때문에 조롱 거리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환상의 조합이다.

아라시는, 멤버 각자의 독특한 성격을 그대로 노출하면서도, 이들 젊은이들이 함께 무언가를 즐겁게 성취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팬들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또 다른 차원의 실시간 드라마, 여자가 빠진 청춘 성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이 드라마의 기둥 줄거리는 학력과 성격이 천차만별이지만 팀 내에서 그것이 하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차별점은 조장된 이미지보다 솔직함을 드러내는 과감함에 있다.

멤버들끼리 정말 친한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마는 게 아니라 그 또래의 다섯 젊은이가 모였을 때 누구에게나 벌어질 법한 상황을 툭 드러내는 것. 철 모르는 남동생 녀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청춘 특유의 에너지로 즐기고 서로 땡깡 부리고 히히덕 거리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은 아이돌임을 입증하는 것. 이것이 이 그룹을 일본 최고의 아이돌로 자리잡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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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DVD를 통해 이들의 데뷔 10주년 기념 공연을 봤다. 한가지 분야에서 다섯 멤버가 10년을 버틴다는 것, 국적을 떠나 나는 그 자체로 이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동시에 멤버들을 소모성으로만 바라보는 우리나라 매니지먼트계에도 이런 인화의 미덕이 자리 잡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기왕 일본의 아이돌 산업을 벤치마킹할 거라면 어떻게 히트 상품을 만들어내느냐 뿐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어떻게 매니지먼트, 즉 관리할 것이냐도 배워온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아라시는 더없이 좋은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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