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넓게 내가 걱정할 일까지는 아니겠지만, 이준익 감독의 신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하 <구르믈>)의 흥행을 낙관할 수 없는 요소가 두 가지 있다.

첫째, 대체로 흥행력을 입증한 시대극의 경우 관객 대다수에게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대동계의 반란이 대중에게 그리 낯익은 소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잘 알려진 박흥용 화백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지만,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정여립의 난이 얼마나 관객들의 호기심을 가로챌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얘기다.

둘째는 영화 외적인 변수로, <구르믈>이 개봉하는 주말, 하필 올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의 첫 주자인 <아이언맨 2>가 뚜껑을 연다는 점이다. 물론 지난해 연말 <아바타>의 위용 속에서도 6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전우치>의 사례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 그렇다면 강력한 입소문이 뒤를 받쳐 주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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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황산벌> <왕의 남자> 등의 시대극으로 굵직한 히트를 기록한 바 있는 이준익 감독의 신작인만큼 기대 요인은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관건은, 그의 성공적인 전작들에 버금 갈만큼 <구르믈>의 경우에도 명확한 컨셉트가 잘 드러나 보이냐에 있다.

앞서 언급한 흥행 변수를 적용해 본다면, 적어도 <황산벌>은 백제와 신라의 대결이라는 익숙한 역사적 시공간을 활용한 코믹 액션극이라는 컨셉트가 분명했고, <왕의 남자> 역시 하도 많이 들어 초등학생도 다 아는 연산군 대를 배경으로 허구의 인물인 광대 공길과 장생이 펼치는 비극적 운명의 드라마 선이 큰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잘 알려진 시대 배경 속에 대립의 서사적 윤곽이 비교적 분명했다는 것이다.

반면 <구르믈>, 일단 포스터에서부터 어떤 컨셉트의 영화인지 잘 가늠이 안 된다. 액션인지 서사 로망인지, 시대는 대충 조선인 듯 한데 누구 얘긴지, 실화인지 허구인지 등등.
게다가 주요 등장 인물이 네 명이나 된다. 영화는 죽은 정여립에 이어 대동계를 이끄는 이몽학과, 정권 찬탈을 노리는 그의 노선을 반대하는 맹인 검객 황정학을 주요한 대립의 주인공으로 설정해 놓고, 한편에 기생 백지, 한편에 서출 견자의 이야기를 얹는다.  

같은 대동계 소속의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이 다분히 정치적 노선 싸움이라면 이몽학에 대한 견자의 복수 행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그의 아버지가 그의 손에 죽었다). 동기는 서로 다르되 목표가 같으니 한 패가 되는 황정학과 견자의 드라마는 그럭저럭 설득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끝내 어정쩡한 것은 백지라는 인물의 존재 이유다. 이몽학의 애인으로 설정된 그녀는 견자와 묘한 감정선을 이끌어가는 역할이지만, 그녀가 빠진다 해도 드라마의 흐름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한마디로 구색 맞추기용 캐릭터가 됐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듣자 하니 원작 만화에선 견자와 백지 사이의 드라마가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영화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립 구도를 더욱 전면에 배치하는 데 신경을 쓴 나머지 백지를 그냥 소비되고 마는 캐릭터로 평가절하해 버린 게 아닌가 싶어지는 대목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정치적 야심과 로맨스, 개인적 복수가 얽히고 설킨 듯한 <구르믈>의 이야기에서 무엇이 중심플롯인지 가늠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한마디로 어디에 감정이입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는 얘기다.

이러다 보니 영화가 담아내는 정서’, 시대의 무게에 짓눌린 개인들의 비극이 효과적으로 드러났는지도 의문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구름이 가렸다고 달이 없을소냐" 등의 알쏭달쏭하지만 '있어' 보이는 선문답을 이어가다 후반부에 이 모든 갈등을 예의 민족주의적 정서로 서둘러 봉합하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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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라는 측면에서 <구르믈>은 빈번한 검술 액션 활극을 선보이고 있는데, 그조차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 챌만큼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두 검술 고수인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결 신에서 액션 안무와 화면 연출 모두 (이를테면 역시 맹인 검객이 주인공인 일본영화 <자토이치>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고수들의 일합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을 포착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어쩌면 <황산벌>이 코미디로, <왕의 남자>가 광대들의 퍼포먼스로 한국영화의 액션 세공력의 한계를 채웠다면, <구르믈>이 보여주는 검술 액션의 야심은 유감스럽게도 또 한번 인상적이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의 음악 설계 역시 <와호장룡>에서 탄둔이 선보였던 북소리 리듬을 답습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구르믈>은 내게 범작 이상의 성취를 건져 올리지는 못한 영화로 다가왔다. 너무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즐길만한 영화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서 관객도 그럭저럭 들 것 같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왕의 남자>를 떠올릴 이유는 없을 것 같다. 4월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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