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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진보 세력을 볼 때마다 드는 두 가지 아쉬움이 있다. 첫째. 그들조차 세상을 이편과 저편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휘말려 있을 때가 많다는 것. 둘째, 지나치게 근엄하고 경직돼 있다는 것. 물론 한국의 정치사회적 지형을 감안컨대 두가지 측면 모두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진보'라는 개념 안에 세상에 대한 열린 시각과 미래에 대한 낙관이 포함돼 있다고 믿는 나로선, 그들이 은연중에 비치는 어떤 도덕적 우월감과 그로부터 풍겨 나오는 듯한 딱딱함에서 일말의 거부감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겠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 프랑스 합작의 다큐멘터리 <예스맨 프로젝트>(3월 25일 개봉)는 다른 누구보다 이 땅의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먼저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어차피 시장주의적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그러니까 굳이 분류하면 우파 쪽에 해당하는 분들은, 이 작품을 볼 리 없고 또 봐도 이해하고 싶지 않을 게 뻔하므로, 그래도 성장보다 분배가 더 중요하고, 기업의 이윤보다 시민의 복지가 더 우선시돼야 한다고 믿는 분들한테 얻을 게 참 많은 영화라는 판단 때문이다.

<예스맨 프로젝트>의 앤디와 마이크, 두 다큐멘터리스트는 유희 정신이 저항과 맞닿아 있음을 알고 있다. 반시장주의, 어쩌면 사회주의에 가까운 신념을 가진 듯한 그들은, 그 진보적 신념을 우직하지만 즐겁게 실천한다. 노골적인 조롱을 통해 모순을 까발리기, 그 과정을 낄낄대며 즐긴다.

이것은 <화씨 911>이나 <식코> 등을 통해 보여준 마이클 무어의 방법론(다큐멘터리 이론가 빌 니콜스는 이런 방식을 수행적 다큐멘터리로 분류한다)과 대동소이하되 또 다르다. 이라크 전쟁의 이면이나 의료 제도와 같은 정치적 모순에 초점을 맞춘 무어가, 의원들로부터 그들의 아들을 이라크로 보내자는 서명을 받거나, 관타나모 수용소에 다가가 911 테러 피해자들의 무상 치료를 요구하는 등의 '생떼 쓰기'를 수행적 전략으로 삼는다면, 이들은 작은 거짓말로 큰 거짓말을 까발리는 수행 전략을 택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20여년전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간 인도의 보팔 참사 책임을 회피하는 다우 케미컬의 비양심을 응징하기 위해 이들은 다우의 대변인을 사칭한다. 그리고 뻔뻔스럽게도 BBC 뉴스의 생중계를 통해 "모든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보상에 나서겠다"는 거짓 성명을 발표하는 식이다.

물론 그들의 거짓말은 금세 탄로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거짓말을 모의하는 과정만큼 거짓말이 탄로났을 때 벌어진 세상의 반응까지 흔쾌히 즐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기극으로 인해 보팔 참사의 희생자들이 무관심에 의해 방치되고 있다는, 그 잊혀진 진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설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런 방식을 '선동'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객관적 기록으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선동의 효과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건, 이미 레니 르펜슈탈이 연출한 저 고전적 나치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에서부터 입증됐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큐멘터리스트의 성찰이며 시대정신이다. 그리고 다큐멘터리가 자신의 성찰을 밀어 붙여 관람자를 각성시키고 설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기왕이면 이처럼 유쾌하고도 발랄한 방식으로 풀어가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첨예한 모순이라는 점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한국에서 이런 유쾌한 사회파 다큐멘터리를 만나기 쉽지 않다는 건 유감이다.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룬 다큐멘터리들은 여전히 너무 진지하고 지나치게 심각하다. 그리하여 담론을 확산시키는 대신 진보를 자처하는 그룹 안에서만 소비되는 자위의 수단으로 그치기 일쑤다. 우리의 진보주의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있거나 선구자적 책임감에 짓눌려 있거나 둘 중의 하나라서 그런걸까.  

때론 농담 한마디가 큰 울림을 준다. 영화 말미에 앤디와 마이크가 주고 받는 농담. "우리가 진짜 세상을 바꾼 걸까?" "바보야, 영화 상영 시간이 고작 한 시간 반인데 그 사이에 어떻게 세상을 바꾸냐?" 물론 그들은 앞서 "사회 단체에 가입하십시오. 한줌도 안되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라는 뼈 있는 선동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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