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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여배우들> 속 대사를 빌자면, "독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논리와 미디어에 의해 합작된 여배우의 이미지는 이들을 스타로 밀어 올리는 대신, 어쩔 수 없이 가식의 허울 뒤로 숨게 만든다. 숱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상황을 견뎌야 하는 동시에 스타로서의 꼿꼿한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 것. 나이 들어가며 변화하는 외모와 주름살에 한숨 짓고, 성형 수술을 얼마나 더 받아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 대중의 여신으로 추앙 받는 동시에 대중의 마녀로 손가락질 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 이런 정신 분열증적 상황을 견뎌낸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재용 감독의 혁신적인 야심이 묻어나는 영화 <여배우들>은 바로 이렇게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로부터 이미지의 베일을 걷어내고, 그들의 인간적 단면을 슬쩍 엿본다. 설정은 패션잡지 VOGUE의 특집 커버 '보석 보다 아름다운 여배우들'의 촬영을 위해 이 시대의 잘 나가는 여배우 여섯 명이 크리스마스 전날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

알려져 있다시피 윤여정을 비롯,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들이 각자의 실명으로, 그리고 각자의 상황 그대로 출연한다. 그러니까 이들 모두 어떤 배역도 아닌, 자기 스스로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설정의 참신성에 생명력을 얹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솔직 담백한 이야기로 이미지로 포장된 여배우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는, 여섯 여배우들의 용감무쌍함이다. 정해진 시나리오에 의해 흘러가는 일부 설정을 빼면, 사실상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모두 애드립이라고 믿겨질 정도로, 여섯 명의 여배우들은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대화를 들려준다. 그래서 이들 여섯 명의 배우가 모두 공동 각본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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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배우 윤여정은 혹시라도 자신이 대타 섭외된 게 아닌가 불안해하고, 중년의 이미숙은 나이 들어가도 여자로 남고 싶은 마음을 토로한다. 고현정은 뒤늦게 나타난 한류 스타 최지우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다 화장실에서 한 판 붙는다. 약간 4차원 세계에 있는 듯한 김민희는 그 작은 얼굴과 갸날픈 몸매로 살 올라 고민인 언니 배우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한 몸에 받고, 김옥빈은 여배우 위계 구조에서 막내로서의 본분을 다하려고 눈치껏 애를 쓰지만 쉽지가 않다.

실제로 이렇게 다양한 세대의 여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벌어질 법한' 상황을 통해, 여배우들 사이의 미묘한 알력과 신경전을 드러내는 영화는, 후반으로 접어들며 슬쩍 이들 모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소통의 파티로 선회한다.

협찬 보석을 기다리며 촬영이 중단된 사이,
샴페인을 마시며 이들이 털어내는 진심 어린 이야기는, 그 자체로 관객들을 폭소의 도가니에 담갔다가 숙연한 상황으로 몰아 갔다 하는데, 이를테면 여배우의 이혼 경력, 매니지먼트 시스템의 허점 등 여배우들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들을 종횡무진 오간다.  

윤여정은 “(최)지우가 일본 시장, (송)혜교가 중국 시장을 맡으면 나는 재래 시장이나 맡을래” 하며 중견 배우 특유의 너스레를 떨고, 이미숙과 고현정은 "남들도 하는 이혼인데, 여배우가 이혼한 건 주홍 글씨냐"며 눈시울을 붉힌다. 어쨌든 이들 모두 스타이기 전에 인간 관계에 서툴고, 질투에 휩싸이고, 쉽게 상처 받는 한 명의 인간인 것이다.

어쩌면 여배우들만의 파티 자리를 슬쩍 엿본 것도 같은 이 영화는, 아무리 입심 좋은 토크쇼 엠씨라도 끌어낼 수 없는 싱싱한 대사들을 건져 올리고 있다. 그래서 모처럼 이미지의 베일 뒤에 가려진, 그들의 인간적 면모뿐 아니라 스타 산업의 이면까지 가늠할 기회를 안겨 준다.

이들이 이미지의 감옥에서 탈출해 허심탄회한 사람으로 돌아와 소통하는 현장이 스타들의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VOGUE의 표지 촬영장이라는 점은, 여배우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어떤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획과 연출의 참신성과 배우들의 진정성이 모처럼 시너지를 이뤄낸 흔치 않은 작품이다. 12 1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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