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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잘 나오지 않는 영화 관련 소식이 공중파 메인 뉴스에 등장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한국영화가 칸이나 베니스 같은 해외 유명영화제에서 상을 탔거나 천만을 돌파하는 흥행 대박 현상이 일어났을 때가 하나라면 나머지는 대개 갈등이 불거졌을 때다. 지난 목요일에도 모처럼 영화 관련 뉴스가 공중파 메인 뉴스를 장식했는데, 후자의 경우였다.

조재현과 윤계상이 주연을 맡아 사형제도의 비인간성을 강조한 영화 <집행자>가 그 주인공이 됐다. 이날 이 영화의 제작자인 조선묵 씨와 배우 조재현 등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개봉 2주차만에 교차상영으로 밀려난 상황을 성토했다.  

교차상영이란, 두 편 이상의 영화를 한 상영관에서 번갈아 트는 방식을 말한다. 대개 관객이 별로 들지 않는 영화들을 그런 식으로 한 데 묶어 상영하는 방식이 요즘 멀티플렉스에선 거의 관행화돼 있다. <집행자>로선 억울할만한 상황이다. 흥행이 안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 2위에까지 오른 영화를 홀대하는 데 대해 분통을 터뜨릴만도 하다. 제작자 조선묵 씨는 삭발까지 했다. 수 개월에 걸쳐 고생고생 만들어낸 자식 같은 작품이 채 빛도 보지도 못하고 밀려나는 상황을 기분 좋게 바라볼 영화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집행자>가 개봉 2주차만에 교차상영으로 밀려난 건 이번주 개봉하는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 <2012> 때문이다. 극장들이 이 영화에 더 많은 스크린을 할애하려다 보니, 기존 상영작들은 스크린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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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에 일어난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힘 센 배급사의 작품이나 흥행력이 예상되는 작품들이 스크린을 과도하게 확보하는 걸, 영화계에선 스크린 독과점이라고 부르는데, 이 때문에 중소 규모 영화들의 설자리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비판은 꾸준하게 제기돼 왔다. 2006년 <괴물>이 7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하자, 당시 영화계 내에 격렬한 스크린 독과점 논쟁이 불거지기도 했다.

한데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장측의 논리가 여전히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극장측의 논리는 간단하다. 어떤 영화에 어느 정도의 스크린을 할애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영업 활동의 자유에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시장주의 국가이니,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그러니까 시장의 논리에 따라가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더 많은 관객들이 이번 주말에 <2012>를 보고자 하므로, 이 영화에 더 많은 스크린을 할애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기존 상영작들에 돌아가는 스크린수가 줄어드는 게 자연스럽다는 논리다.

반대 진영에선 문화 논리를 앞세운다. 여러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멀티플렉스라면, 관객들이 여러 편의 영화 가운데 선택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줘야 하는 게 지당한데, 그 시장 논리를 따르다 보면, 이를테면 이번주에 <집행자>를 보기 위해 극장에 들른 관객들은 허탕을 칠 수 있지 않겠냐는 거다. 시장 논리를 들이댄 극장측의 장삿속이 관객들의 관람 선택권을 침해하고, 더 나아가 상영 영화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있다면 문제가 크다는 얘기다. 영화는 상품이지만 동시에 문화 컨텐츠라는 걸 망각한 처사라는 주장이다.

이런 문제 의식에 따라 스크린 독과점 현상을 견제하고자 하는 제도적인 개선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6년 <괴물>의 스크린 독과점 논란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영화 다양성 실현을 위한 입법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멀티플렉스에서 한 영화에 30% 이상의 스크린을 할애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게 골자였다. 그러나 법안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사실 법안으로 정식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앞서 말한 극장 측의 시장 논리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김대중 정부 이후의 문화 정책 원칙에도 위배된다는 시각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영화계 안팎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나오는 말은, 시장의 자율 기능에 맡기자는 얘기였다. 실제로 영화계의 오피니언 리더들 가운데서는 업계 내 자율 규제 합의를 하면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순진한 환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 시장의 자율 기능이란 게 얼마나 현명한지, 한 영화가 전국 스크린의 절반이 넘는 1천 개 이상의 스크린을 꿀꺽해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안그래도 친(親)시장 정책을 쓰는 현 정권 아래에서 이 상황을 견제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더욱 난망이다. 영화인들도 스스로가 당사자가 됐을 때라야 파편적으로 성토할 뿐, 단 한번도 이 사안에 대해 일치된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는 점도 낙관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다.

공자님 말씀처럼 들리겠지만, 문화 발전의 기본 전제는 다양성이다. 다양성 위에서 창작자들의 새로운 창의력이 움트고, 관객들의 심미안이 깊어진다. 그런데 돈의 논리, 시장의 논리는 문화적 다양성까지 고려할 만큼 착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가만 놔두면 이윤을 향해 무한 질주하게 돼 있다.

그래서 정책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문화 향유자의 입장에서, 다양성의 씨앗이 말라 죽기 전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게 절실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독과점을 견제하는 것은 시장의 건강성을 지키려는 지극히 시장주의적 접근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공정거래법이 따로 있어 독과점 또는 시장 지배적 사업자들을 견제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 극장가가 내세우는 시장 논리는, 정확히 말해 시장 논리가 아니라, 개별 기득권의 논리다.

극장도 살고, 제작자들도 살고, 더불어 관객들까지 행복해질 수 있는 솔로문의 지혜를 강구해 볼 수 있을 터이나, 안타깝게도 한국에선 이해 관계의 덫에 걸려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 이 나라의 영화문화 수준은 늦가을에 뒹구는 마른 낙엽처럼 푸석하고 처연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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