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속한 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정치인이나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계급배반투표’라 한다. 예를 들면 월 소득 100만 원 이하 저소득층 가장이, 저소득층의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법안에 찬성한다면 이는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는 행위에 속한다. 선거결과가 공개될 때마다 진보를 주장하던 정치세력은 계급배반 현상 앞에서 절망하곤 하였다.  

진보의 구호는 사실 어렵고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를 위한 정책을 펼친다 말하지만 상대가 하는 말을 당최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내가 무식하게만 생각되는 것이다. 반면 보수의 구호는 쉽고 익숙한 용어가 대부분이다. 선거판에서 ‘잘 살게 해 주겠다’는 약속보다 더 쉬운 구호가 어디 있는가. 그들의 말이 지켜질 수 있는 약속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를 무식한 사람으로 만들고, 나를 위한 일이라는데도 정작 그 내용을 모르니 소외감만 느껴지는 구호보다는, 거짓말일지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용어를 택함으로써 대중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옳고 그름보다 아는가 모르는가가  더 중요한 세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옳은 길 보다는, 몇 번이나 당했으면서도 익숙한 길을 택하는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계급배반의 역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청률 40%가 넘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담(김남길)’은 누구보다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를 선보인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비담에 대한 글을 접하게 되는데, 상당수의 글이 비담을 일러 ‘사이코패스’라 부르니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자칫하면 대중이 사이코패스가 나타나주기를 열망하고 있지 않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비담을 사이코패스로 정의함으로써 그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얻는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고도 이를 기뻐하니 영락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냐며 안전한 경계를 세우고 안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 너머에 있는 비담을 마음 놓고 열광한다. 너는 우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안으로 넘어오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너에게 열광하겠다. 시청자는 모종의 계약에 동참한 사람인양 입을 모아 비담을 사이코패스라 부르고, 그 원인을 유전적 결과에서 찾는다. 엄마인 미실을 닮아 태생적으로 살인마로 태어났다는 것이 그 설명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인자라는 것은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가.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이코패스’라는 변종 유행어는 필요했던 모양.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아이는 자신의 주변상황을 끊임없이 살피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든다. 부모는 나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나를 보호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나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지표로 작용한다. 이러한 위치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 아이들은 소유물을 통해 빈약하나마 지표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의하려 한다. 친구들이 가진 것을 자신도 가져야하고, 나만의 것임을 확인함으로써 안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담은 스승인 문노와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생을 살아왔다. 가족을 가지지 못하였음은 물론이고 그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였기에, 그는 가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그것을 가지지 못하였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결핍의 대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면서, 결핍을 채우려고만 하는 상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한 후 변화한 비담의 모습은 권력욕에 불타기보다는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확인하는 과정이며, 결핍의 대상을 구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는 자기현시적이며, 자기애가 강해 완전범죄를 계획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살인을 즐기지만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인생을 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피해자를 신중히 고른 다음, 적당한 때를 기다려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나 비담의 칼은 나와 적을 구분하지 않는다. 살인광으로 등장하였으며, 비열한 모습까지 보였음에도 그가 연민을 일으키는 것은, 그의 폭력에 자기파괴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그에게 열광하는 동시에 그 파멸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비담을 가두기 위해 소환한 '사이코패스'라는 이름의 경계 바깥에서.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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