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우 장진영을 사석에서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다. 2003년 <싱글즈>가 대박을 친 뒤 축하 파티장에서였다. 당시 그녀는 함께 주연을 맡은 엄정화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쑥맥이었던 나는 그녀들의 바로 옆자리에 앉는 행운을 얻어 놓고도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 때 장진영은 수더분한 인상으로 지인들과 꽤 쾌활하게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영화에서 봤던 그 인상 그대로, 아름다운 외모 안에 강단을 갖추고 있는 듯 보였다. 반칙왕, 2000 소름, 2001
장진영은 또래 여배우들에 비해 뒤늦게 스타 대열에 합류한 배우였다. 미스코리아 출신이지만 연기 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2000)때부터였다. 이 때 그녀는 이미 20대 후반의 나이였다. 주인공 송강호가 다니는 레슬링 도장의 관장 딸 민영으로 분한 장진영은, 잘못 건드렸다간 뼈도 못추릴 것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뽐내며, '외강내유'의 포스를 선보여 충무로 관계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가로챘다.
많은 사람들이 장진영과 관련해 <싱글즈>를 떠올리지만, 장진영이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확인시킨 계기는, 김명민과 함께 출연한 윤종찬 감독의 걸작 호러 <소름>(2001)이었다. 무너져가는 낡은 아파트에서 살며 시도 때도 없이 남편에게 구타 당하는, 그래서 삶이 지옥 그 자체인 선영을 통해 장진영은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연기혼을 과시한다. 특히 이웃집 남자 김명민과 남편을 공모 매장한 뒤 두려움을 강박적으로 떨쳐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펼치는 정사신은 압권이다. 영화는 흥행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장진영은 대어로 떠올랐다. 이제 그녀를 바라보는 감독과 제작자들의 시선이 180도 달라졌다. 평론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싱글즈, 2003
이후의 행보에서 장진영은 조금 안전한 길을 택했다. 멜로 <오버 더 레인보우>(2002)와 <국화꽃 향기>(2003)에서 각각 이정재와 박해일의 상대역으로 잇따라 출연하며, <소름>의 선영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히로인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애썼다. 그러나 대중은 장진영으로부터 지고지순한 멜로의 주인공이 아닌 그의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강단을 더 보고 싶어 했었는지, 엄정화와 공연한 <싱글즈>로 또 한번 대박을 터뜨린다. 권칠인 감독의 이 도발적인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장진영은 주체성 드높은 능동적 싱글 여성의 전형을 연출해 낸다. 그녀가 연기한 나난은 럭셔리한 삶을 꿈꾸며 현실을 저당잡히는 판타지 지향형 싱글이 아닌, 자신의 일과 우정, 그리고 현재를 힘껏 껴안는 생활 지향형 싱글로, 동시대의 여성들에게 설득력과 통쾌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캐릭터로서 손색이 없었다. 청연, 2005
장진영은 윤종찬 감독의 <청연>(2005)을 통해 또 한번의 비상을 꿈꾼다. 이 작품에서 장진영이 연기한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은, 어쩌면 뒤늦게나마 배우로서 또 다른 능선을 뛰어 넘겠다는 장진영 그 자신의 야망이 투영된 캐릭터였다. 그래서 장진영은 박경원이 되고자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흔적을 영화에 아로새긴다. 그녀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구름을 넘어 수직 도약할 때, 그녀는 죽음의 위협을 강렬한 절규로 떨쳐낸다. 비행기는 마침내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러 천길 창공의 한점이 돼 우뚝 선다. 시대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싶었던 한 인물의 실존이 그 장면에서 장진영의 육신을 통해 재연되고 있었다. 인상적인 영화였지만 불운의 영화이기도 했다. 중간에 제작사가 바뀐데다, 개봉 전후 영화가 담은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친일 행적 등이 논란이 되면서 흥행에서 또 한번 고배를 마셨다.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2006
김해곤 감독의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2006)에서 장진영은 또 한번의 무리수를 던졌다. 드세고 억척스러운 술집 여자 연아. 결혼할 상대를 따로 둔 남자를 좋아하는, 그래서 결국 배신당할 게 뻔한 사랑을 하는 멍청한 여자가 그녀가 맡은 역할이었다. 제목과 달리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끌벅적한 악다구니의 향연을 펼쳐 놓는 이 영화에서 장진영이 연기한 연아라는 캐릭터는, 장진영의 탁월한 캐릭터 연출에도 불구하고, 특히 여성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싱글즈>을 빼면 장진영이 매번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해온 과정은 대중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는 안주하지 않고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 그러니까 반짝 하고 마는 엔터테이너가 아닌, 스크린 위의 캐릭터로 말하는 진짜 배우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충무로에서 보석 같이 빛나는 몇 안되는 30대 여배우 가운데 한 명인 장진영은, 아직 보여줄 게 너무 많은 배우였다. 그녀가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난 게, 그래서 두고 두고 쓰릴 것이다. 어쨌든 장진영은 가장 찬란한 순간에 별이 되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