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88만 원 세대의 잔혹 우화

영화 이야기 2009. 8. 9. 12:37 Posted by cinemAgora

스포일러 다량 함유- 영화를 관람한 분들만 읽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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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영화로서 <10>이 보여주는 설정은 흥미롭다. 상금 10억 원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8명의 젊은이들이 모인다. 증권사 직원부터 술집 종업원, 고시생까지. 호주 오지로 안내된 이들은 인터넷으로 중계될 서바이벌 게임을 시작하지만, 시작부터 뭔가가 심상치 않다. 첫 번째 탈락자가 주검으로 발견된 뒤, 여성 참가자 한 명이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난데없이 살해당한다. 두번째 탈락자다. 그렇다. 탈락하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대경실색한 참가자들은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은 속았다. 이벤트를 마련한 장 PD(박희순)는 미친 놈이고, 어찌됐든 이들은 차례로 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사는 방법밖에 없다. 이들의 선택은 그러나, 처음부터 진짜 서바이벌 게임 속으로 이들을 몰아 놓은 장 PD의 예상대로 물꼬를 튼다.

참가자들 모두가 20대로 설정돼 있다는 것은, 이 영화의 함의를 드러낸다. 파트타이머 조유진(신민아)과 프리랜서 PD 한기태(박해일)를 비롯해 참가자 대부분은 비정규적 삶을 살아가는, 이른바 88만 원 세대다. 불안한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들을 이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으로 불러 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처음부터 반목과 냉소에 익숙해 있다.

게임의 잔인한 룰이 밝혀지면서 이들은 함께 덫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게임이 되고 만다. 나의 생존 앞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거액 앞에서 이들은 살아온 대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가혹한 정글 사회가 이미 이들의 염색체에 심어 놓은 대로. 영화 <10>은 극도의 개인주의와, 짓밟히지 않으려면 먼저 밟아야 한다는 경쟁 사회의 룰을 내재화한 채 이 사회의 최하층으로 몰리고 있는 88만 원 세대의 우화를 스릴러의 틀로 펼쳐 놓고 있는 셈이다.

질문이 남는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개인적인 복수심을 배설하기 위해 번지수를 잘못 찾은 미치광이 장 PD.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드러낸다. PD가 이런 음모를 꾸민 동기를 극적인 반전의 몫으로 남겨 놓기 위해 영화는 의도적으로 참가자들의 좌충우돌만을 부각시킨다. 이들에겐 생각할 여지가 없다. 왜 이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는지를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그저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칠 뿐이다. 그리하여 문제의 핵심은 이들의 이기심에 국한된다. 그러니까 자업자득인 셈이다.

만약 참가자들 사이의 공통 분모(그러니까 이들이 어떤 사건 현장에서 우연히 조우했던 이들이라는 사실)가 조금 더 일찍 밝혀졌다면, 참가자들의 비(非)도덕적 판단에 대한 장 PD의 반(反)도덕적 복수가 과연 정당한지 여부에 대한 흥미로운 갈등과 대립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 아닌가. 반전으로 얼버무리고 끝내기엔 너무 거대한 화두라는 얘기다. 욕망과 증오가 충돌하는 살풍경을 화급하게 수습하는 결말부에 이르면, "우리 모두 겁에 질린 채 살아가요"라는 유진의 한마디 말고는 이들을 정글에 가둔 시스템의 가공할 잔혹함을 드러낼 단서가 거의 없다. 살육과 복수의 해프닝 뒤에 남는 뒤끝은, 그래서 여운이 짧다.

이야기의 짜임새라는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장 PD의 행동과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정당한 동기를 부여하는데, 그리고 참가자들을 모두 죽이는 데 집착해서인지 영화는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의문점을 남긴다. 예를 들어 장 PD는 어떻게 자신이 미리 점 찍은 이들 8명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10억 상금이 탐난다 해도 그가 의도했던 이들이 한 명만 빼고 모두 신청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신청하지 않았던 친구는 과연 어떤 경위로 그 자리에 오게 됐나. 이 모든 상황의 결정적인 모티프가 된 한기태의 제보 화면은 과연 그렇게 근접한 상태에서 생생하게 찍힐 수 있을까?

, 어차피 생과 사가 걸린 게임 상황의 긴장감에 초점을 맞춘 영화인 만큼 이런 건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의 논리적 개연성이 부족하면 긴장감도 헐거워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세태에 대한 씁쓸한 풍자를 담으려는 <10>이 반전 스릴러의 문법을 고수하기 위해 생략하고 배제한 선택이 오히려 풍자의 강도를 낮추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장르적 쾌감도 함께 반감되고 만다. 뭐든 형식과 내용은 동전의 양면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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