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뭐냐. <오감도>엔 에로스조차 없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 이상도 없다. 이건 그야말로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다섯 편의 농담 한 줌이다. 왜 이런 옴니버스를 뜬금 없게도 기획했는지 의아할 노릇이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변혁 감독이 연출한 <His Concern>은 부산행 KTX 안에서 우연히 앞자리에 앉은 여성에게 단단히 필 꽂힌 사내의 작업 상황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중계한다. 수컷적 욕망을 번드르르한 옷매무새와 말솜씨로 포장해야 하는 남자의 처연한 고민이 객석에 미소를 안겨준다.
공감 100%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시선이 가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이성 앞에서 어느 정도는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자신의 위선을 스스로 조롱하며 “철학적인 밤이다”라며 얼버무리는 화자의 지적 허영심은 살포시 미소까지 짓게 만든다.
기대는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에피소드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죽은 아내의 빈자리를 그리워 하는 남자 주인공의 ‘지지리 궁상’적 고독은 그의 전작들에서 익숙하게 봤던 설정인데다, 에피소드가 맥없이 끝나갈 무렵 “그래서 뭘?”이라는 질문이 나도 모르게 삐져 나온다. 한 템포 쉬어 가자는 얘기? 1시간 반짜리 멜로에 익숙한 탓인지 허 감독은 20분 내에 압축적으로 정서를 전달하는 게 버거웠던 게 틀림 없어 보인다.
그렇게 허망한 가슴 추스리고 나니, 배종옥과 김수로, 김민선 등 나름 호화 캐스팅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유영식 감독의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이건 또 너무 오버해 헛웃음을 자아낸다. 뒤따라 민규동 감독이 연출한 동성애 또는 양성애 커플의 판타지적 동거 스토리와, 스와핑 비스무리한 걸 시도하는 럭셔리 고교생들을 다룬 오기환 감독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한마디로 갈수록 지루하다는 얘기 외엔 뭐 굳이 그 감상을 적고 싶지는 않다. 사실 마지막 에피소드는 기억도 안난다.
영화 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이 의기투합한 작품이라고? 모두들 한 가락씩 하는 기성 감독들로 성장한 분들인데 아마도 학창 시절의 풋풋함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투영된 것일까? 마치 어느 대학 영화과 졸업 작품들을 묶어 놓은 기분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이 기획의 문제점은 에로스라는 공통 화두를 어떻게 담아낼 것이냐에 대한 감독 각자의 고민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는 데 있다. 그냥, 마땅히 작품도 없고 하니 싼 제작비로 쉬어가는 기분으로 찍은 듯한 분위기랄까. 대역인 것 같아 보이는 배종옥의 섹스신 빼고는 가끔 카메라가 여배우들의 몸을 훑을 뿐, 그리 에로틱하다는 느낌을 얻을만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기획 옴니버스로, 1990년대 중반에 강우석, 장현수, 정지영, 김유진 감독 등이 참여한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7가지 이유>라는, 한심무쌍한 영화가 있었다. <오감도>가 에로스를 바라보는 태도는 이보다 조금 진화하긴 했지만, 13년이라는 문화적 시간차를 감안하면 <맥주가...>가 당시 받았던 냉소 이상의 대접을 받긴 어려울 것 같다. 재기와 아이디어를 합쳐서 참신한 걸 만들지 못할 거면 이런 유의 게으른 기획은 참여한 감독들이나 애써 보러 간 관객들이나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