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에 '까대는' 건 평론가들의 몫만은 아닌 것 같다. 예전 같으면 개봉 예정작에 대해 혹평이라도 할라치면 "힘들여 만든 영화, 네가 뭔데 초치느냐"며 평론가들 죽일 놈 취급하는 리플 많이 봤는데, 최근엔 일부 네티즌들이 평론가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개봉전부터 독설의 융단폭격을 가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박쥐>는 성기 노출 신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개봉도 전에 1점 세례를 받았으며, <트랜스포머>는 내한한 관계자들의 불성실한 태도가 괘씸죄에 걸려 '안보기 운동'으로까지 번졌다.
이번에는 25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신동일 감독의 독립영화 <반두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요컨대, 이 영화가 한국에서 청소년 성폭행 등의 악행을 일삼는 불법 체류자들을 미화하고 있다는 것.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이 영화의 스틸을 이용한 안티성 패러디 사진이 몇 개 인터넷에 올라왔는데, 한마디로 불법 체류자가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여고생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음 아고라에선 일찌감치 이 영화의 상영 및 제작 중단을 요구하는 청원이 뜬 바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둘러싼 논란을 가지고 글을 쓸까 말까 고민을 했다. 쓰면 영화와 관련한 모든 담론을 즉각 마케팅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노이즈 마케팅이네 뭐네' 할 것도 같고, 이 영화에 대한 트집 잡기를 일삼는 이들의 주장을 일부러 전파하는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속편할 일이겠으나, 논란의 상황 자체도 우리 사회의 왜곡된 시각의 단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짚어볼만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993년에 조엘 슈마허 감독의 <폴링 다운>이 공개됐을 당시 시끄러웠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긴 했지만,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이 영화가 한국인을 모욕하고 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4년 뒤에 조심스레 개봉한 영화를 보며 그게 좀 오버였다는 걸 알게 됐지만, "우리가 너희 나라에 얼마나 많은 돈을 준지 알아?"라며 한국인들을 싸잡아 자린고비에 막돼 먹은 사람들로 몰아 붙인 영화 속 주인공이나, 백인 중산층 주인공의 비뚤어진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는 장치를 문제 삼아 한국인이 비하됐다고 자존심 상해 하는 일부 언론이나 왠지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라고들 부른다. 자신의 한정된 경험 또는 지엽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경험 대상이 속한 집단이나 전체의 속성을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례는 굳이 고릿적 미국영화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고리타분한 지역 감정에 휘둘려 "전라도 깽깽이들은 안돼"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그들 역시 하필 자신을 괴롭히던 군대 상관이 전라도 출신이었거나, 돈 떼먹고 사라진 지인이 그 지역 출신이라는, 자신의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특정 지역을 싸잡아 한 통속으로 몰아 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반두비>를 비난하는 이들이 특정 지역 출신 이주 노동자들과 관련해 어떤 개인적 경험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길 없으나, 극소수 불법 체류자들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들과 같은 국적의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안된다든가, 한국의 여고생과 로맨스를 펼치는 설정이 등장하면 안된다고 하는 사고는, 전형적으로 앞서 언급한 일반화의 오류다.(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는 이런 현상을 '제 3자 효과'라고 말한다. '(똑똑한) 나는 미디어의 잘못된 메시지에 저항적일 수 있는데, (순진한) 다른 이들은 악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지각적 편향을 말한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성범죄는 한국에 들어와 있는 영미권 사람들(한국에선 이들을 원어민이라고 부른다) 가운데서도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그러니까 이른바 선진국 출신들이 선한 역할로 등장하거나 한국 여성과 로맨스를 펼치는 영화도 만들어 상영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인가? 한국에서 숱한 범죄를 저지른데다, 죄없는 여중생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주한 미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당장 <트랜스포머>부터 미군을 미화하는 영화들은 굉장히 많은데 말이다.
굳이 특정 지역 출신의 이주 노농자들을 콕 집어 '안된다'고 주장하는 이면에 "저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거나 '늬네 나라로 꺼져 버려"라고 함부로 핍박하는 영화 속 일부 어글리 한국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설령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 10명이 범죄를 저질렀다손 치더라도 모든 방글라데시인들이 범죄자는 아니다. 만약 미국인들이,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장본인이 한국인이었다는 이유로, 모든 한국인을 잠재적 사이코패스 범죄자라고 낙인 찍는다면 기분 좋을까?
거꾸로, 그런 점에서 <반두비>는 성찰이 깊은 영화다. 이 영화는 적어도 우리 사회가 이방인들에게 함부로 들이대는 일반화의 잣대가 과연 얼마나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인지 곱씹어볼 기회를 준다. 어쨌든 <반두비>는 반대론자들이 지레 걱정하듯 '폭행을 일삼는 불법체류자가 한국 여고생을 꼬시는' 얘기가 아니다.'꿈을 빼앗겼지만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은 한 남자와 비슷한 처지이지만 당찬 기개를 지닌 한 소녀가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다. 다만, 남자가 방글라데시 사람이고 소녀가 한국 사람일 뿐이다. 결정적으로, 수백 개 스크린을 점령한 블록버스터를 제쳐두고 굳이 <반두비>를 골라 볼 정도의 관객이라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사리 판단쯤은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이다.
덧붙여, <반두비>에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내린 영상물등급위원회에 묻고 싶다. 여고생이 윤락업소에서 일하는 설정이 모방 염려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는데, 2년 전 개봉했던 <사랑>의 성폭행 장면이나 폭력 장면은 모방 염려가 없어서 15세 이상 관람가를 준건가? 원조 교제로 가족을 부양하는 여고생이 주인공인 <다세포 소녀>도 15세 관람가였는데...여고생을 폭력적으로 왕따시키고 심지어 납치까지 일삼는 <꽃보다 남자>가 버젓이 TV 브라운관을 통해 인기리에 방영된 게 엊그제였다. 이제사, 청소년 보호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 나신거라면, 왜 하필 자극을 위해 선정성을 집어 넣지 않고 현실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아프게 담은 영화를 골랐는지 의아할 뿐이다. 영화는 결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현실의 잔인함을 보여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신가? 당장 그들의 발밑에 일상적으로 밟히는 '여대생 마사지' 찌라시는 어쩔 수 없고? 등급위원이라면 텍스트와 서브텍스트, 콘텍스트 정도는 알고 영화를 보실 줄 알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