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이 글에는 ‘태권브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맥가이버가 휴지통을 뒤져 무기를 제조하고, 키트가 실없는 농담을 해주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일주일마다 죽다 살아났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야 하다니.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다가도 그 생각을 하면 화가 치밀었다. 왜 죽는지 이유도 모른 채 지구와 함께 사라져버릴 존재라니. 아무 힘도 없는 내가 너무 작아 보여 견딜 수 없었다. 주인공은 아니어도 주인공의 첩보무기 정도는 만들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보자고 다짐한 것이 그 즈음이다. 하지만 생은 녹록치 않아 태권브이의 김박사는커녕 조수의 조수조차 되지 못한 채 변두리로 물러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국회의사당에 태권브이 조종실이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정도로 나이가 들었기에 포기한 꿈을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구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웅에게 ‘너도 참 힘들게 산다’며 술이라도 한 잔 건네고 싶은 어른이 되었을 뿐.
블록버스터의 계절이 돌아왔다. 심판의 날을 겪은 존 코너는 기계군단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스파이더맨은 4편 제작 소식이 들려온다. 더불어 2주 뒤면 트랜스포머가 개봉한다고 하니 여름이야말로 지구를 구하는 영웅들의 계절인 게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살아 온 과거나 현재가 아닌, 바로 미래 때문에 위협 받는 생을 살아간다. 자신이 아직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삶. 심판의 날이 찾아와도 문제, 찾아오지 않아도 문제. 설령 미래를 바꾸었다 해도 ‘스카이넷’이 영원히 등장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존 코너는 평생 불안을 떨치지 못한 채, 일상적인 삶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격할 수밖에 없다. 심판의 날이 온다면 저항군을 조직해 인류를 구하는 영웅의 삶을 살 수 있으나, 만약 그 날이 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피해망상증 환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운명. 존 코너의 정신건강을 생각한다면 심판의 날이 와 주는 게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다.
이처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데 들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런저런 생각하느라 보내고 나니 연민이 깊어져 오히려 영화감상에 방해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오락영화를 오락물로 대하지 못하고, 코미디를 코미디로 보지 못하게 된 것. 나보다 너를 더 잘 이해하는 이가 어디 있겠냐며 영화 속 주인공에게 참견하려 드는 걸 보면 역시 늙긴 한 모양이다. ‘다정多情도 병인 양 하여’가 생각나는 요즘이다.
Posted by 늙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