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눈뜨자마자 갑작스런 비보를 접한 필자는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말 그대로 비상이다.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지지자였던 개인적 입장에선 상당히 충격인 사안이었지만 기자라는 본분을 생각할 때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했다. 담당 부서는 당연 정치부와 사회부. 연예부 기자인 필자하곤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안이나 대형 사건사고 현장 경험이 많은 터라 사회부 후배들과 함께 봉하마을로 직접 내려가는 중책을 맡게 됐다.

그렇게 한낱 연예부 기자인 필자는 노 전 대통령 서거라는 중차대한 사안의 취재 현장에 투입됐다. 동료 연예부 기자들 입장에선 ‘한낱 연예부 기자’라는 표현이 거슬릴 수도 있다. 마치 정치부나 사회부 기자가 연예부 기자보다 더 월등하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 어쩌면 그 이유가 지금 필자가 쓰는 이 글의 주제일 지도 모른다.



 격분한 주민과 노사모 회원들이 노태우 씨가 보낸 화환을 내동댕이치고 있다


필자를 비롯한 <일요신문> 특별취재팀에 떨어진 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현장 르포 기사를 작성해야 했고 두 번째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임박 시점의 근황이었다. 검찰 출두 이후 노 전 대통령이 외부 접촉을 끊고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이를 위해 봉하마을 주민, 노사모 관계자, 비서진 등을 두루 접촉했고 24일 아침엔 봉화산에도 올랐다.


23일 내내 격분한 주민과 노사모 회원들로 인해 격정적이었던 봉하마을은 24일 새벽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았다. 23일 밤 충격으로 인해 제대로 걷지도 못해 부축을 받아 걸어가다 무릎을 꿇은 채 주저 않아 울먹이던 영화배우 명계남도 24일 새벽엔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봉화산에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걸었던 산행 길을 따라 걸어가며 조금이나마 고인의 생각에 다가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저 뒷편 산행 길은 이미 경찰들로 인해 통제돼 있었다. 나름 등산을 좋아하는 편인지라 산세를 보니 논길을 따라 돌아가면 산 뒤편으로도 올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참을 걸어서 사저 반대편으로 돌아가 산행을 시작했다. 구두에 재킷 차림, 누가 봐도 등산객이 아닌 기자스러운 차림으로 시작한 산행, 다행히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두를 신고도 오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쉬운 부분은 정상 가까운 곳, 그러니까 부엉이 바위 바로 인근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더 이상의 접근은 통제로 인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경찰 CSI 요원들이 봉화산으로 오르고 있다

 

산에 오르며 가장 많이 생각한 부분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취재 행태였다. 검찰 출두를 전후해 수많은 사진기자들이 사저 인근에 몰려들었는데 집 앞뜰을 거니는 모습은 기본, 창을 통해 집 안에 있는 모습까지 촬영돼 보도됐다. 심지어 봉화산 정상 부근에 있는 사자 바위 위에 올라가 있는 기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22일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사저를 감옥이라 표현한 노 전 대통령은 “카메라와 기자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집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고 아무도 올 수 없다”고 얘기한 뒤 “저의 집 안뜰은 제게 남은 최소한의 인간의 권리"라고 언론에 호소했다.


필자는 그 당시부터 취재진의 취재 범위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필자는 ‘연예인 사생활 침해’로 둘 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기자에 속한다. 소위 ‘뻗치기’라 불리는 잠복취재, 이에 이은 미행취재 등을 통해 여러 건의 특종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아니 대다수의 연예부 기자들은 늘 기자의 취재에도 넘어서는 안되는 '한계점'을 넘지 않으려 노력했다.
 

몇 년 전 어느 여성 톱스타를 취재할 당시의 일이 대표적이다. 워낙 외부의 눈에 잘 안 띄는 편인데다 당시 모종의 사안과 연루돼 세간의 관심이 그 여성 톱스타에게 집중돼 있었다. 이에 필자는 사진기자와 함께 해당 연예인의 집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이미 <일요신문> 외에도 네 개 매체의 기자들이  와 있었다. 그러다보니 십여 명의 기자들이 차를 줄 세워 놓고 몰래 그녀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잠복 취재에 돌입해 일주일이 넘게 흘렀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새벽 일찍 나와 자정을 넘겨 철수했는데 나중에는 아예 현장에서 밤을 세웠을 정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포착됐다. 해당 연예인이 사는 집 뒤편 야산에 오르면 창문을 통해 집 안이 보인다는 점이다. 망원경을 가져와서 보니 집 안이 어느 정도 들여다보였고 해당 연예인의 모습도 가끔씩 포착됐다. 다음 날 한 매체 사진기자가 망원렌즈를 가져왔고 비로소 사진 촬영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렇게 촬영한 사진은 모두 폐기처분됐다. 아무리 취재 대상이 유명인(일각에선 연예인도 공인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인 연예인이지만 사적인 영역인 집안에 있는 모습을 몰래 촬영한 것은 취재 범위를 벗어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은 현장에 있던 기자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각 매체 데스크들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날 이후에는 뒷산에 오르지 않았다. 쓰지도 못할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힘들게 산에 오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연예인 취재 현장에서도 기준을 지키려고 했던 '한낱' 연예부 기자는 집 앞뜰, 노 전 대통령의 표현처럼 '최소한의 인권'인 그곳에서까지 촬영을 감행하는 매스컴의 취재 열기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기자 입장에선 모두 취재 대상일지라도 전직 대통령과 연예인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검찰 수사 임박 등의 엄청난 이슈와 연예인의 사생활 관련 풍문 역시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렇지만 검찰 수사가 임박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사저에서의 휴식까지 제한하며 개인의 인권을 훼손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사적 공간인 '집'은 원칙적으로 취재 공간에서 벗어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수한 경우,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호텔에 객실을 잡고 비밀회의를 하는 모습을 창밖에서 촬영하는 경우는 가능하다. 호텔 객실 역시 투숙한 뒤에는 개인 소유의 집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공간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공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이고, 범죄 행위 등에 연관돼 있다면 취재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물론 그 기준을 명확히 하는 데 어려움이 많이 따르긴 한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사저를 방문하는 모습은 취재 대상으로 볼 수 있다. 관건은 검찰 수사에 연루된 전직 대통령이 집안이나 앞뜰을 거닐며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사적인 공간에서의 공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에 해당되느냐의 여부다.
 

선배 기자들에게 물어보니 그 사진이 시사 하는 바가 있다면 취재 대상이 될 수는 있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에 연관된 상황에서 '괴로운 심경'이라는 부분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라면 보도 가치는 있다는 것. 물론 기본적인 취재 매너에서는 벗어난 일이다. 요즘 몇몇 매체에서 연예인의 열애설을 취재하기 위해 잠복 미행 등의 밀착 취재 방식을 동원하곤 하는 데 그럴 때마다 주류 언론에선 ‘파파라치적인 취재’, ‘사생활 침해 보도’라며 강하게 비난하곤 한다. 그런데 이번 사안에선 주류 언론이 앞장서서 이런 방식의 취재를 했다. 연예부 기자가 하면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부서 기자는 이런 취재를 해도 별 문제없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필자의 견해는 '한낱' 연예부 기자인 필자의 좁은 소견과 부족한 경험에 의한 생각일 뿐, 한국 언론의 전반의 취재 원칙이나 관행과는 별개일 수 있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촛불 앞에 한 여성 조문객이 엎드려 통곡하고 있다.

검찰 수사 과정에도 의문이 따랐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가십거리에 불과한 연예인 관련 수사의 경우, 관계자들이 수사 도중에 정보를 살짝살짝 흘릴 수도 있지만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인 전직 대통령 관련 수사는 보안이 생명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멍청한 필자의 생각은 정확하게 어긋났다.
 

과거, 경찰의 피의자 신분 연예인에 대한 정보 보호는 박수갈채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이곳에 ‘모경찰랑가’라는 글을 포스팅했을까. 예를 들어 HOT 출신 가수 이재원이 성폭행으로 구속됐을 당시, 담당 경찰은 이재원의 구속 여부에 답변하기는커녕 아예 이재원이라는 이름을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정도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고 장자연 문건 파문에선 경찰이 얼마나 피의 사실 공포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여론이 아무리 들끓어도 고 장자연 문건에 오른 고위층 인사들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경찰은, 기자들의 거센 요구에 ‘피의사실 공표는 불법’이라며 맞섰다.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도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중간수사발표에선 이미 공개한 발표문조차, 문서로는 배포하지 않았을 정도다. 글자 하나로 인해 명예훼손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데, 이 얼마나 피의자의 인권을 생각하는 선진 경찰의 아름다운 모습이란 말인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노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정반대였다. 수사 도중에 검찰을 통해 알게 모르게 각종 수사 정보가 흘러나왔고 언론은 이를 보도했다. '피의 사실 공표죄'와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개념들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어찌 보면 한낱 연예부 기자들의 취재력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정치부나 사회부는 보안이 철저한 전직 대통령 수사 관련 정보도 척척 빼내는 데 연예부 기자들은 한낱 연예인 관련 가십 사건 정보도 빼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데 고 장자연 문건 파문의 경우 방송사와 일간지 사회부가 총출동한 사안이었음을 감안하면 반드시 연예부 기자가 무능한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연예계가 그만큼 경찰의 인권 보호가 잘 이뤄지는 영역이라는 얘기일까.


봉하마을에 있는 내내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번처럼 기자라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부끄러웠으며 시민들에게 냉대당한 취재 현장은 처음이었다. 마을 주민이나 노사모 회원들은 몇몇 보수 언론사를 집중적으로 비난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앞에 떳떳할 수 있는 언론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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