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표류기' 일상 속의 무인도

영화 이야기 2009. 5. 18. 10:23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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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에 떠밀려 자살을 시도했다가 한강 밤섬으로 떠밀려간 남자, '싸이질'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은둔형 외톨이 여자의 이야기가 병렬로 흐르다 만난다.

출근길에 강변 북로를 달리다보면 서강대교 언저리의 밤섬을 볼 수 있다. 밤섬을 거의 매일 바라보는 나로선 일상의 공간처럼 느껴지는 그곳을 무인도처럼 설정해 놓은 영화가 처음엔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에 이 영화의 노림수가 있었다. 일상의 공간이 무인도다. 뻔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공간 속에서 각자만의 유배지를 지니고 사는 삶. 그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니겠냐고, 영화는 시침 뚝 떼고 말한다.

그 억지스러워 보이는 상황 설정을 받아들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무렵,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영화는 차근차근 설득력을 얹기 시작하는데, 김씨(정재영)의 밤섬 은둔 생활이 본격화되면서부터이다. 처음엔 밤섬을 탈출하려고 시도하던 그는, 이내 그곳에서의 삶이 나쁘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곳에선 누구도 그를 괴롭히지 않을 뿐더러, 아주 소박한 욕망, 그러니까 먹고 싸고 자는 문제만을 해결하고 살면 그 뿐이다. 우연이 주운 짜파게티 포장지와 아직 뜯지 않은 스프 봉지에 감격한 그는, 이제 스스로 밀을 재배해 자장면을 만들어 먹겠다는, 원대한 꿈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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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은 우스꽝스럽지만 처절하다. 동시에 인간이 잊고 지냈던 원초적인 행복, 그러니까 노동과 개척의 아날로그적 쾌감을 환기시킨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지 하나, 고독을 상쇄시킬 짝일터, 또 다른 섬으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온다. 몇 년 째 자기 방에서 한발짝도 나서지 않는 여자 김씨(정려원)가 망원 카메라로 그를 우연히 발견하고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남자 김씨와 반대로 자기 방안에 스스로 유배된 여자 김씨는 인터넷을 통해서만 세상을 만난다. 그녀가 만나는 세상에서 그녀는 다른 이가 될 수 있다. 다른 여자의 사진을 대문에 걸고 "언니 이쁘삼'이라는 댓글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느낀다. 예쁜 구두나 명품 가방도 퍼나르기만 하면 자기 것이 되는 세상, 인터넷 안에서 그녀는 신데렐라요 백설공주다. 유일한 취미 생활인 카메라로 한강을 내려다보다, 자신만큼 괴상한 인간을 목격한다. 이제 두 무인도 간의 조심스러운 교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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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그랜트 주연의 영화 <어바웃 어 보이>(2002)는 이런 대사로 시작된다. "인간은 모두 섬이다." 그리고 이런 대사로 끝난다. "인간은 모두 섬이다. 그런데 그 섬들은 바다 밑으로 연결돼 있다." 파편화된 도시인들의 지극히 고독한 삶을 극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고독을 극복하는 열쇠말로 '소통'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씨표류기>는 <어바웃 어 보이>와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접근 방식은 사뭇 다르다. 아니, 우리가 비슷한 영화를 다르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적절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현대형 고독'이라는 추상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여기, 그러니까 우리 주변의 구체적 세계를 퍼올리므로 절절하다. 이것은 아버지의 캐롤송 저작료로 먹고 사는 영국의 바람둥이 훈남 이야기도 아니고, 카드 결제에 시달리고 인터넷 댓글에 일희일비하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남자 김씨는 밤섬에서 나와야 하고, 여자 김씨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용감하게 드러내야 한다.

영화는 두 김씨의 상황을 극단화해 제시하며 낄낄거리는 웃음을 유도하고 있지만, 객석의 동병상련도 계산에 넣었을 게 분명하다. "늬들은 뭐 달라?"하는 질문. 영화를 본 뒤, 내가 표류하고 있는 지점의 좌표를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 나침반과 지도가 남아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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