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하지만 음미할만한 스펙터클

영화 이야기 2007. 8. 16. 19:32 Posted by cinemAgora
<화려한 휴가>와 <디워>를 둘러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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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사회적인 논쟁으로 확산되는 경우를 우리는 적지 않게 봐 왔다. 1천만 명 안팎의 대규모 관객 동원에 성공한, 이른바 대박 영화의 경우가 대개 그랬다. 그래서 충무로에는 5백만 명까지는 영화의 힘에 의한 것이지만, 그 이상의 흥행 스코어는 사회적 분위기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속설이 통용될 정도다. 영화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파장은 처음에는 영화 자체가 가진 미덕과 가치에서 출발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그런 정도의 단계를 훌쩍 뛰어 넘어 버린다. 사실 나처럼 영화와 관련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조차 여기서부터는 별로 말할 일이 없어진다. 논쟁의 주도권이 어느 단계부터 시민 사회로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가 신문 문화면의 주연에서 순식간에 사회면의 조연으로 바뀌는 셈이다. 때론 정치면으로 갈 때도 있다.

골육상쟁의 아픔을 블록버스터급 비주얼로 재확인한 <태극기 휘날리며>나, 국가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에 의해 개인의 존엄이 깡그리 무시됐던 시대의 공공연한 비밀을 신파적이고도 자극적으로 들춰낸 <실미도>, 그리고 약자를 코너로 코너로 몰아붙이는 우리 사회의 온갖 추잡한 모순을 한강 괴수로 형상화한 <괴물>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신드롬의 주인공이 됐던 시대극 <왕의 남자> 역시, 정치 권력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불신을 어느 정도 활용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영화들이 갖는 공통점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모두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처를 대중 영화의 화법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이들 작품들의 흥행 노림수는 결국 그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데 있다. 상처가 완전히 치유됐다면, 그리고 영화가 소환한 역사적 사실이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을 어떤 것이 됐다면, 1천만 명 이상의 관객이 자발적으로 자기 돈을 내고 관람권을 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과 아픔을 드러내는 방식이 관습적인 오락 영화의 틀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공통 분모다. 극장까지 가서 딱딱한 역사 수업을 기대할 리 없는 대중 관객은, 스크린에 영사된 비극적인 상황이 '오락적 스펙터클'의 범주 안에 있을 때 '영화적 체험'을 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평단 일각에서 이들 영화들이 역사를 소환하되, 결국 휘발시킨다고 비판하는 것도 바로  대중영화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자조의 발로일 것이다.

지금 한창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화려한 휴가> 역시 이런 쟁점의 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영화였다.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당시,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꽃잎>이나 <박하사탕> 등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앞선 영화들과 비교하며, 블록버스터의 외피를 두르고 광주에 대한 죄책감을 소비하거나, 혹은 결국 이렇게 정리하고 청산 또는 망각하자는 게 아니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실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히 광주를 대중 상업 영화로 불러 내다니! 이 영화의 탄생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 댄 (나를 포함한) 많은 영화 글쟁이들의 모습은, 결국 광주에 대한 거대한 죄책감의 방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논쟁이 크게 쓸모가 있었던 건 아니다. 관객들은 평론가들의 과민한 우려와 달리,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지는 것 이면의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광주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려 온 많은 이들이 에두른 망각이 아닌 정면으로 응시하는 기억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해 낸 영화의 힘을 칭송했다. 나 역시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난 뒤 흥분에 젖어 이 영화가 역사를 소환하되 휘발시킨 혐의를 얻고 있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론을 채택하긴 했지만, 그 의미는 남다르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80년대 이후 민주화의 거대한 기폭제가 됐던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이 도도하게 현재진행형일 뿐 아니라, 그 치유되지 않은 거대한 상처를 이렇게라도 보여주는 것, 오락적 스펙터클의 범주로라도 대중에게 역사적 추체험의 기회를 안겨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일은 결코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지지해야겠다고 믿으면서 내가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빠뜨렸다는 것을 요즘 뒤늦게 깨달았다. 광주 정신이 현재진행형이니만큼 여전히 광주 정신을 훼손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야겠다고 굳게 믿고 획책하는 세력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 말이다.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게도 ‘전두환 전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전사모)’ 회원들이 그걸 퍼뜩 깨닫게 해줬다.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최근 이송희일 감독이 <디워>의 전투적인 광팬들을 향해 조소했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한여름 밤의 공포’였는데, <화려한 휴가> 안보기 캠페인을 펼치는 그들이 들이대는 비논리와 몰역사적 주장들은 그 자체로 한여름 밤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을 두고 ‘기억하려는 자와 그 기억을 방해하려는 자들간의 싸움’이라고 부른다면 어울리지 않게 격조 있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건 그냥 한 편의 썰렁한 말장난 개그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대로 영화가 주는 사회적 파장이나 반향은, 그것이 크든 작든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관련해 시민 사회의 인식 또는 무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런 관점에 본다면, <화려한 휴가>를 둘러싼 일련의 해괴한 논쟁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이 사회에 여전히 역사적 기억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려는 후진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과, 스스로가 속해 있는 시민 사회를 영화 한편에 휘둘리는 우민 공동체로 천대하는, 일종의 자발적 노예화의 속성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의 주동자는 전두환이 아닌 김대중’이라느니, 당대 광주 시민들을 ‘총을 든 폭도들’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데다, 영화가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해석들을 보면서, 역사적 기억이라는 게 입장에 따라 이렇게까지 징그럽게 굴절되고 왜곡될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전히 그 분을 ‘각하’로 모시는 그들이 그 각하의 명예 회복을 위해 지금의 굴욕을 인내하자는 처연한 다짐에서 폭력에 길들여진 마조히즘적 배타성의 극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것도 인터넷에서의 자발적 동조자들이 1만 5천 명에 달한다는 것을 뼈아프게 각성하는 것은, <화려한 휴가>가 소환한 비극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역설적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화려한 휴가>를 보지 말자고 부르짖는 그들이 차라리 <디 워>를 보라고 강권하고 있는 상황은, 내게 <디 워>의 일부 열성팬들이 보여주고 있는 과격한 배타성과 묘하게 중첩돼 보인다. 그것은 분명 다른 차원이지만, <디 워>를 핍박 받은 고독한 영웅의 드라마틱한 기사회생과 동일시하며, 그 비판론자들을 싸잡아 적대시하고, 홍위병적 모독과 파시즘적 테러를 서슴지 않는 태도(이송희일 감독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 영화와 열성팬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성정체성까지 들먹이는 조리돌림을 당했다)와 ‘전사모’의 태도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현상적으로 통용되는 명분은 애국심이다. <화려한 휴가>에서는 애국가가 올려 퍼지는 시점에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된다. ‘전사모’의 홈페이지에도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영화 <디 워>를 보는 게 애국이라는 주장이 난무한다. 그러나 그 애국은 다른 관점을 가진 자들을 서슴지 않고 패대기 치는 애국이다. 과거에 대한 뼈아픈 반성은커녕 틈만 나면 전범들의 위패를 찾아 신사 참배하는 일본 총리의 애국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애국이다. 남의 나라 국민이야 살든 죽든, 테러 세력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태평한 원칙만 되뇌는 부시의 애국과 대동소이한 애국이다. 그들만의 애국에는, 제대로 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성찰이 빠져 있다. 동시대의 시민과 그들이 함께 일궈온 소중한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이 빠져 있다. 애초에 성찰에 닿을 수 없으니 왜곡된 기억을 ‘역사적 사실’이라 우겨 대는 일에서 하등의 부끄럼을 느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여름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단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이 사회가 얼마나 담론 형성과 의사소통에 미숙한지, 여전히 적지 않은 이들이 역사적 정의에 대한 불감증과 왜곡된 애국주의에 함몰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살풍경을 목격하고 있다. 재론하거니와 어떤 영화보다 더 강력한 그 스펙터클은 씁쓸하지만 음미할 가치가 있다. 쓰디 쓴, 그러나 정신이 번쩍 나는 각성제다.

* 8월 14일자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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