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소녀, 마리나가 가르쳐준 진실

영화 이야기 2007. 8. 7. 16:5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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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부산에 아프가니스탄 국적의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지금 한국을 ‘부드럽고 달콤한 나라’로 기억한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해운대 어딘가에서 생전 처음 맛 본 아이스크림 때문이란다. 그 소녀의 이름은 마리나 골바하리.

   작년 5월, 나는 일본에서 ‘마리나(MARINA)’ 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일본 NHK의 프로듀서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바로 아이스크림 소녀 마리나 골바하리이다. 그녀는 최초의 아프가니스탄 영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국내에도 개봉됐던 세디그 바흐막 감독의 영화 ‘천상의 소녀’에서 주인공 오사마역을 연기한 주연배우. NHK는 영화제작비 가운데 상당부분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영화 ‘천상의 소녀’의 제작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방송했고, 당시 열세 살에   불과했던 아프간 소녀 마리나의 처절한 삶은 일본인들의 가슴을 울렸다고 한다.
 
    거리의 소녀 마리나는 탈레반의 고문으로 다리를 못 쓰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구걸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이었다. 영화가 뭔지도 몰랐던 소녀는 단지 몇 푼의 돈을 위해 오디션에 참가했고, 바흐막 감독 앞에서 폭격으로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두려움에 가득 찬 눈망울로 샘물처럼 투명한 눈물을 쏟아낸 덕분에 주연으로 낙점됐다. 애초에 아프간 최초의 영화제작기로 출발한 다큐멘터리는 이 순간부터 아프간 소녀 마리나의 영화제작기로 방향을 급선회한다. 영화 ‘천상의 소녀’는 탈레반 정권의 폭압으로, 부르카의 굴레로 신음하는 소녀의 삶을 오롯이 담아낸 덕분에, 2003년 깐느 영화제 3개 부문을 수상했고, 2004년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까지 받게 됐다. 더구나, 백악관 특별시사회를 마친 부시대통령이 열렬한 칭찬과 함께, 관료들에게 의무 관람을 지시했으며, 메이져 배급사인 MGM이 예외적으로 두 달간이나 상영할 수 있게 했다는 뉴스에 이르면, 그 어떤 제3세계 영화도 누리지 못한 미국인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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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속 오사마의 눈물은 대부분 탈레반 정권 때문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속 마리나는 폭격으로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바흐막 감독은 눈물이 필요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언니 얘기를 꺼내 마리나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 영화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하나같이 ‘폭격으로 죽은 언니’를 언급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마리나의 언니를 죽게 한 포탄이 미군의 것이었음을 말하진 않는다. 그렇다. 마리나의 언니는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가 보자. 부시대통령은 이 영화를 미국인 모두가 봐주길 원했다. 탈레반 정권에게 핍박받는 영화속 오사마를 통해 자신이 일으킨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던 것. 만약, 부시대통령이 영화속 오사마의 눈물이 실은 자신의 군대가 떨어뜨린 포탄에 의해 사망한 한 소녀를 위한 눈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아프간 소녀 마리나는 언니를 죽게 한 ‘그’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유력한 후원자가 된 사실을 알았더라면, 무슨 말을 남겼을까?

    이제는 다큐멘터리 ‘마리나’로 돌아가 보자. 영화촬영 내내 두려움에 가득 찬 눈망울로 시종일관 눈물을 쏟아내던 마리나가 돈에 팔려가는 장면을 찍기 위해 생전처음 화장을 하게 됐다. 곱디고운 새 옷에 말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얼굴가득 퍼진 연분홍 화장품. 거리의 소녀 마리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해맑은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가난과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있던 열세 살 소녀의 감성이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나 역시 화면속 마리나를 보며 같이 웃었다. 잠시나마 삶의 무게를 내려놓은 그녀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리나의 수줍은 미소가 바흐막 감독의 얼굴을 일그러뜨렸기 때문이다. 영화속 오사마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마리나의 미소가 아니라, 오사마의 눈물이 필요했던 것. 급기야, 감독은 마리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카메라는 이 과정을 그저 담담하게 지켜볼 뿐이다. 감독의 고함소리가 높아갈수록, 마리나의 미소는 사그라졌다. 봄날의 아침햇살처럼 싱그러웠던 마리나의 미소는 결국, 폭포수 같은 눈물로 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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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마리나’의 프로듀서는 내게, 담당 카메라맨이 영화촬영과정을 지켜보며, 아프간인들을 위해 영화를 만들겠다던 바흐막 감독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었다는 얘기를 털어놨다. 바흐막 감독이 마리나의 눈물을 짜내기 위해 살벌하리만치 가혹하게 다그치는 장면의 편집을 두고 제작진들끼리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어쨌든 그 장면은 전파를 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일본 시청자들은 그 장면을 신인감독의 과도한 열정쯤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다만, NHK 내부에서 이 장면의 사용으로 인해 바흐막 감독에 대한 시청자들의 신뢰가 약해지는 바람에 다큐멘터리의 흡인력이 떨어졌다는 문제제기만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바흐막 감독을 만난 적이 없다. 6개월 동안 그를 밀착 취재한 다큐멘터리 제작진도 확신하지 못한 그의 진정성을 내가 어찌 판단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영화 ‘천상의 소녀’를 두고 벌어진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영화와 현실이 마주했을 때 겪어야 하는 아이러니를 확인할 뿐이다. 마리나의 아버지는 탈레반 정권의 고문으로 불구가 됐고, 언니는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바흐막 감독의 협박에 가까운 호통은 그녀를 눈물짓게 했지만, 그로인해 마리나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귀빈으로 초대되는 영광을 안았다. 영화속 오사마에게 고통을 주는 악마는 명확하건만, 현실속 마리나의 악마는 때때로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대체 아프간 소녀 마리나의 적은 누구이며 동지는 누구인가.
 
   영화속 세상은 단순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영화속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대체로 명확하지만, 현실속에서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그 같은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비록, 영화가 현실의 거울일지라도, 그 거울은 온전히 감독에 의해 ‘가공된 것’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마케팅이라 불리우는 ‘교묘한 속임수’가 결합되면, 의외로 강력한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과거, 영화 ‘한반도’와 ‘괴물’이 그러했고, 요즘엔 ‘화려한 휴가’와 ‘디워’를 둘러싼 논쟁이 그렇다. 나는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한국에는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는 관객이 대단히 많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서로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그들 모두 ‘애정’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으되, 실은 ‘망각’이다. 영화를 만든 이들은 물론이고, 특정 영화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에게도 이런 관객들은 훌륭한 먹잇감이 된다. 바흐막과 부시는 대한민국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 주 : 이 글은 작년 이맘때 필름2.0에 기고했던 칼럼을 약간 수정한 글입니다. 과거에 제 칼럼을 읽으셨던 분들께서는 오해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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