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 소비되는 방식

영화 이야기 2009. 4. 27. 20:06 Posted by cinemAgora
 
며칠전 <박쥐> 시사회 단상을 올렸더니 적지 않은 분들이 글이 너무 어렵다고 핀잔이었다. 쉽고 평이하게 쓰는 것만이 블로그적 소통의 정답일까 싶다. 이를테면 '창작과 비평'을 집어든 이들이 저자들한테 글이 너무 어렵다고 지청구를 부리진 않을 터이지만 웹에선, 특히 블로그에선 타깃 독자를 상정해도 소용이 없다는 게 딜레마이긴 하다. 그렇다고 글 시작하기 전에 '난이도 상중하' 이 따위 표시를 해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쨌든 박찬욱 감독과 관련한 옛글을 찾아 봤더니 2006년 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관련해 FILM2.0에 쓴 칼럼이 있었다. 대동소이한 얘기인데, 이건 조금 더 쉽게 읽히지 않을까 해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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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나 보다. 인터넷으로 감지되는 분위기만 봐도 그렇다. 박찬욱 감독, 임수정, 정지훈 주연의 영화라는 ‘네임 밸류’에 걸맞지 않게 이 영화에 대한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네티즌 평점은 5점 미만이다. 나는 이른바 '대중적 취향'을 수치적으로 단순화한데다, 끊임 없이 홍보 목적의 조작 시비가 일고 있는 네티즌 평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치라면 영화에 대한 초기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짐작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대한 관객 평가는 다양하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건 영화가 지나치게 ‘난해하다’ 는 평가들이다. 감독이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는 불평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비교적 ‘괜찮게’ 본 나로선 관객들의 이런 평가에 고개가 갸웃해진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영화에 작가적 서명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노릇일 터. 하지만 표면적으로도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하는데 생각이 닿으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군과 일순은 같은 정신병원에 살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다. 영군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고 밥을 안 먹는다. 이런 영군을 딱하게 여긴 일순은 그녀에게 밥을 먹이기 위한 모종의 작전을 실행에 옮기고, 그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는 어떤 정서적 파장이 생겨 난다. 제작진이 이 영화를 두고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라고 선전한대로, 박찬욱 감독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 체계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분열증 환자들의 엉뚱한 행동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고, 생물학적으로 젊디 젊은 두 남녀가 소통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이를테면 에로스의 에너지에 다다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영화가 어렵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평단에서조차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려워 하면 어떡하나 지레 걱정하는 얘기들을 한다. 그 이유에 대한 나의 가설은 이렇다. 그동안 박찬욱의 영화는 늘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됐다. <친절한 금자씨>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미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알리바이를 등에 업고, 박찬욱 브랜드의 잠재적 상품성을 확신한 저널과 대자본의 압박은 그의 영화 세계에 범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예술가의 심오한 메타포가 숨어 있으리라는, 어떤 신뢰감을 조성한다. 그 결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정도는 ‘봐줘야’ 일정 수준의 문화적 향유를 한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어느새 그의 영화는 문화 소비 행위의 '격'을 일컫는, 일종의 브랜드 파워로 고착된다. 기표만 남고 기의는 사라져 버린 현상, 혹은 브랜드만 남고 담론은 휘발된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박찬욱 감독에게 이런 데 대한 저항적 자의식이 있었는지, 아니면 어떤 타협의 소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그는 영화가 지나치게 난해해 보일 수도 있는 여지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이 영화는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즐길 수 있는, 말그대로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로 완성됐다. 내 경우 두 사람의 병든 뇌에서조차 병들지 않고 흘러 나오는 에로스의 기운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영화의 마지막, 롱쇼트라 시각적으로 확실히 분간하긴 어렵지만, 발가벗은 채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비로소 섹스를 나누는 장면이라면, 박수 치며 축복해주고 싶을 정도의 감정적 고양을 경험하고 나왔다. 바로 그런 긍정적 휴머니티가 이 영화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미덕이었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박찬욱 감독이 대중에게 원한 지점도 그 정도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일부 관객들이 그에 신작에 대해 실망감을 안게 된 배경에는 앞서 말했듯 '박찬욱'이라는 문화 브랜드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신뢰가 역설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찬욱의 신작인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도, 정지훈과 임수정이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에 왠지 숨은 뜻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고, 애써 감독의 (심오한) 의도를 해석하려다 답이 안나오자, 영화에 대한 배신감을 넘어 박찬욱이라는 문화 브랜드에 대한 배신감으로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감독의 입장 역시 '대략 난감'일 것 같다. 쉽게 말해도 어렵게 해석되고, 다른 시도를 하는 것조차 '이미 많이 가진 자의 여유'쯤으로 치부되는 처지에 놓였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그에 대해 약간은 안티 권력적 시선이 엿보이는 것 역시 앞서 말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홀로 남은 기표의 역습이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브랜드가 아닌 '창작자' 박찬욱은 선 하나를 그어 놓고 예술이라고 우기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내 눈에는 저널과, 일부 관객들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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