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언론 시사 후기

영화 이야기 2009. 4. 24. 21:10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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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감독 박찬욱의 영화적 감수성이 마이너한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아, 마이너하다는 게 결코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영화광이고 그의 작품에는 그의 예술가적 자의식에 영향을 미친, 때론 대중에겐 많이 낯설기도 한, 온갖 영화에 대한 오마주 또는 비틀기로 가득차 있다. 그러니까 그는 이미 존재하지 않은 영화 언어를 창안한다기보다, 있어 왔던 장르적 언어들을 그의 독특한 프리즘을 통해 번역하고 제시해 왔다는 얘기다. 이번 작품 <박쥐>에서도 그는, 뱀파이어라는 익숙한 설정을 빌어와 누아르와 호러를 코미디와 뒤섞으며, 말하자면 장르를 뒤틀고 논다.

기획영화였던 <공동경비구역 JSA>를 빼면, 장편 데뷔작 <달은...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 이른바 복수 3연작, 그리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과연 엄밀한 의미에서 대중적이었다고 주저없이 평가할 수 있을까? 그를 칸영화제 시상식 무대로 호명한 쿠엔틴 타란티노에 더 가까운 감수성을 지닌 듯 보이는 박찬욱은, 그럼에도 한국의 언론과 극장가에서만큼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대우를 받아 왔다. 확실히 기현상이다. 아, 또 한번, 이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기이한 부조화가 그의 작품 세계에 어떤 요소로 작동할 것인가 궁금하다는 얘기다.

스즈키 세이준만큼 괴상하고 타란티노만큼 폭력적이고 기타노 다케시만큼 메마르고 길예르모 델토로만큼 강렬한 세계, 어쩌면 주류적 취향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의 상황을 연출해 놓고도 박찬욱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그 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용산 CGV의 거의 전관을 빌어 시사회를 열고, 기자와 평론가들을 한 시간 일찍 오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이 압도적인 영화 외적 상황에서 박찬욱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그는 과연 타협했을까, 저항했을까. 아니면 두 가지를 모두 추구했을까. 호기심이 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 견해로는, <박쥐>는 그의 전작들만큼이나 강렬한 영화다. 그런데 '전작들만큼'이라는 게 중요하다. 이 말은 내가 이 영화에서 전작을 뛰어 넘는 새로움과 전율을 얻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사실, 이런 평가는 일종의 역차별이다. 그러니까 그가 박찬욱이기에 할 수 있는 얘기다. 이걸 만약 낯선 신인이 연출했다면 '보석 같은 발견'이라는 상찬이 뒤따랐겠으나 박찬욱의 신작이기에 어지간한 강렬함도 밋밋함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미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목격했던 그것들이 <박쥐>에도 있다. 하나 더 추가됐다면, 연예 언론들이 앞다퉈 대서특필할 게 뻔한 송강호의 성기 노출 신이 포함됐다는 것.(어쨌든 매우 필요하고도 적절한 노출이었다.)

이토록 강렬하고도 독특한 영화에서 나는 왜 전율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왜 후반부부터 지루한 동어반복처럼 느껴졌을까. 원인을 따지는 건 여전히 헷갈린 문제다. 이렇게 분류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박찬욱의 문제, 그리고 어쩌면 그의 영화를 소비하는 우리, 아니 나의 문제. 박찬욱의 문제는 마이너한 감수성이 거대한 브랜드로 고착된 데 대한 압박을 수용하지도 벗어 던지지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고, 나의 문제는 그의 브랜드가 실은 뒤틀린 짝퉁을 추구하지만 명품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늘 미장센이 차고 넘치는 박찬욱의 세계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져 놓고도 그에게서 나의 협소한 영화적 심미안과 세계관에 새로운 자극이 되어 줄 또 한방을 기대한다. 정확히 말해 익숙한 건 기대다. 헌데 내게 <박쥐>는 익숙한 기대에 익숙한 방식으로 화답하는 영화로 느껴졌다. 물론 강렬하다. 그러나 그 강렬함은 우리 영화의 대표 브랜드, '타란티노적 스필버그'의 건재를 확인시켜주는 강렬함이다. 복수니 욕망이니 증오니 죄책감이니 구원이니 하는 화두는 핑계로 증발되고 스타일과 패션만 남는 것. 영화는 없어지고 배우와 감독만 남는 것. 어쩌면 우리와 저널리즘이 박찬욱을 소비하는 방식이 딱 그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영화는 어땠냐고? 나쁘진 않았다. 놀랍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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