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자단, 그리고 '엽문'

영화 이야기 2009. 4. 9. 02:04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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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류> 1993 원화평

 
<황비홍>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연걸이 한물 간 듯한 홍콩 무협의 명맥을 이어나갈 무렵인 90년대 초반, 한 낯선 얼굴의 액션 배우가 내 눈에 번쩍 뜨였다. <철마류>라는 작품에 등장한 견자단이었다. 실제 이연걸에 맞먹는 무술 고수로 알려진 그는, 원화평 감독이 황비홍 붐에 슬쩍 편승해 청조 말기를 배경 삼아 연출한 이 영화에서 단박에 내 시선을 가로채고 말았다. 오홋! 저 이의 무공은 사뭇 남다른 걸! 나는 그의 강하면서도 유연한 액션 연기에 감탄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은 약간 느끼하다 싶을 정도의 꽃미남 계열이어서, 액션의 파괴력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내뿜지는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과연, 그는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이연걸의 아성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가 영화 감독이자 무술 감독으로, 홍콩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맹활약을 펼쳐 왔다는 사실을 아는 국내 관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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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2002, 장이모우


어쨌든 <철마류> 이후 견자단의 모습을 볼 기회가 드물어 아쉬었던 차에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에서 은모장천으로 등장한 그를 만나게 됐다. 견자단은 <황비홍 2>에 이어 또 한번 이연걸과의 멋진 액션 신을 조합해 냈다. 중력을 유린하며 힘과 부드러움의 현란한 교차를 드러내는 고수들의 대결! 무협 장르가 안겨줄 수 있는 극상의 쾌감을 추구하려는 장이모우의 야심을 부족함 없이 채운 견자단은, 사실상 이 영화의 모든 액션 장면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고 수려한 대목을 짧고도 강렬하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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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황후> 2008, 정소동

사실 견자단은 그가 가진 내공과 상관 없이, 영화계에선 초대형 빅스타로서의 대우를 받진 못해 왔다. 직접 제작하거나 연출한 작품들을 빼면 주로 훈남훈녀 스타들을 빛내주는 조연에 머문 경우가 더 많았다. 지난해 개봉한 <연의 황후>에서도 여명과 진혜림의 멜로 라인에 치중하느라 정작 견자단의 액션은 눈요기 정도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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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 2009, 엽위신


그런 견자단의 진면목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뒤늦게나마 만들어졌다. 곧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엽문>. 명실상부한 견자단의 영화라고 불러야 마땅할 정도로, 무술 대가 견자단의 명품 액션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영화 <엽문>은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영춘권 고수 '엽문'의 일대기를 다룬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스토리 라인은 다소 전형적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기에, 중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데 앞장선 엽문의 일화를 통해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 <엽문>이 남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가 무협 액션 영화로부터 기대하는, 인간의 신체가 맞부딪칠 때 파열되는 날 것 그대로인 충돌의 쾌감과 움직임의 미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미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팔과 다리의 동선과 상하체의 자세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견자단의 존재감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그의 '간지 작렬' 무술을 보고 있자면, 박태환이 힘찬 팔 짓으로 물을 가르거나 김연아가 트리플러츠를 위해 도약하는 모습을 볼 때 터져 나오는 그 감탄,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로움을 갖게 된다. 그는 이소룡이나 성룡과 확연히 다르고, 이연걸과도 또 다른, 견자단만의 무술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영화적 시각화를 위해 아크로바틱한 요소들을 도입한 기존 액션과 선을 긋기에 더 찬란해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이 영화에서 액션이 아니라 '무술'을 보여준다.

시사회를 통해 본 영화 <엽문>에서 견자단의 얼굴엔 젊은 시절의 느끼한 꽃미남 이미지가 빠진 대신 중후한 카리스마가 들어차 있었다. 벌써 40대 중반이 훌쩍 넘어섰지만 배우 견자단의 전성기는 사실상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뒤늦게나마 물 만난 견자단을 만나니, 내가 더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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