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왜 우리는 이다지도 멍청할까,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쉴 때 말이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나 역시 하루에도 두 세번 씩 바보 같은 언행을 후회하고 사니까. 신이 인간을 빚은 게 정말 맞다면, 그 역시 하늘에서 인간 사회를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을 게 틀림 없다. 에구~내가 어쩌다 저런 것들을 만들었누, 하시면서.
조엘과 에단 코엔 형제의 세계관이 아마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멀리는 <바톤 핑크>부터 가까이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까지, 그들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늘 전전긍긍하고, 무리수를 두고, 예상치 못한 세상의 반격에 고꾸라진다. 생각은 하지만 멀리 보지 못하고, 행동은 하지만 늘 자기 발등을 찍는다. 한마디로 바보들의 행진이다. 이번 영화 <번 애프터 리딩>도 마찬가지다.
얘기는 이렇다. 자존심만 드높은 CIA 직원 오스본(존 말코비치)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이유로 좌천당하자 홧김에 때려 치운다. 그리고는 재직중 얻은 별 거 아닌 정보로 회고전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의 아내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바람둥이 보안관 해리(조지 클루니)와 바람 피우다 이혼을 결심한다. 그녀는 오스본의 재정 기록을 CD에 담아 변호사에게 넘기는데, 하필 그 안에 오스본의 회고록이 담겨 있다. 이걸 헬스클럽 트레이너 채드(브래드 피트)가 우연히 줍는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린다(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마침 성형 수술 경비도 마련할 겸 이걸로 한 몫 챙길 계획을 세운다. 바보들의 행진이 시작된다.
영화 <번 애프터 리딩>을 보다 보면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폭소가 아니라 헛웃음이란 게 중요하다. 하나 같이 찌질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들의 군상극이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해리는 인터넷을 통해 수 많은 여성들을 만나러 돌아다니면서도 아내가 자신을 버릴까 전전긍긍하고, 채드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른채 신나서 까불댄다. 성형 수술에 집착하는 린다는 모든 걸 자기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달인이다. 세상이 자신을 몰라준다고 성질만 내는 오스본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기로 가득차 있다. 어디 그들 뿐이랴. CIA조차 이들이 왜 쫓고 쫓기는지 모른 채 그냥 조용히 사라져 주기만을 바란다. 모두들 주체적이고도 현명하게 행동한다고 믿지만 어느 누구도 바보가 아닌 자가 없는 곳, <번 애프터 리딩>이 그리는 이 세상이다.
'읽은 뒤 태워 없앨 것'이라는 뜻의 제목만 보면 이 영화는 첩보물을 연상시킨다. 실제 첩보물이었다면 아마 오스본의 자료는 일급 기밀에 해당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이걸 별 거 아닌 회고록 찌꺼기로 바꿔 놓고는, 쓸데 없는 데 목숨 거는 인간들의 추격 게임을 낄낄대듯 풀어 놓는다. 첩보물 특유의 긴장감이 놓일 자리에 조소를 배치하는 냉소적 유머 감각이 빛나는 대목이다.
존 말코비치와 틸다 스윈튼,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말할 것도 없고, 브래드피트와 조지 클루니의 능청스러운 연기 변신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로 쾌감이다. 특히 백치에 가까운 헬스크럽 트레이너를 연기한 브래드 피트는, 벤자민 버튼 역 말고 차라리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아야 마땅했을 정도다. 18세 이상 관람가, 3월 26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