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꽃' 상처와 치유의 성찰

영화 이야기 2009. 3. 22. 00:48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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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의 홍대 앞은 인산인해다. 봄비가 오락가락, 날도 궂은데 주차장 골목은 개성과 젊음을 뽐내는 이들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인파를 뚫고 다큐멘터리 <할매꽃>을 보러 상상마당에 들렀는데, 바깥 세상과는 천양지차다. 나를 포함해 단 다섯 명의 관객. 객석을 슬쩍 내려다 보는 영사기사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며칠 전 YTN 뉴스 스튜디오에 나가 “<워낭소리>의 성공으로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 게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배급사 보도자료를 보니 개봉 주말 6개로 시작된 상영관이 다음 주엔 14개까지 늘어난다고 하니, 그렇다고 섣불리 비관할 상황도 못된다.

각설하고, 나는 <할매꽃>같은 다큐멘터리가 비록 <워낭소리>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반의 반 정도라도 관객이 들기를 바란다. <워낭소리>가 관객들의 보편적 향수를 끄집어낼 기회를 선사한 반면, <할매꽃>은 우리에게 내재된 상처, 그러니까 유전되고 상속되고 있는 상처를 들춰낸다. 헌데 그 상처가 이념이라는 문제와 얽혀들 때, 그것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보편’과는 거리가 먼 기피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누군가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떠올리는 것조차 치떨리는 과거의 상처라 할지라도 용감하게 직시하지 않는다면 용서나 화해, 혹은 치유는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할매꽃>의 문정현 감독은 그 일을 바로 자신의 가족사 안에서 수행한다. 자전적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띤 이 작품에서 감독은 임종을 앞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의 지난했던 삶을 정리해 보라는 집안 어르신들의 부탁을 받는다. 따라서 그의 주요 취재 대상은 외할머니의 딸이자 그의 어머니를 포함한 일가 친척들이다.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민을 당한 뒤 그 후유증에 평생 시달린 외할아버지, 그를 면회갔다가 경찰이 쏜 공포탄에 정신병을 얻고 만 작은 외할아버지, 자수하러 가는 길에 총살당한 외할머니의 오빠 등이 산 자들의 회고를 통해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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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반 세기 전 좌우 이념 대립의 여파로 희생당한 이들을 넘어, 원죄처럼 주홍글씨를 안고 살게 된, 그러니까 살아남아 고통의 삶을 견뎌온 이들로 시야를 넓힌다. 묵묵히 가족의 쇠락을 감당해온 외할머니는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정작 말씀을 할 수 없는 외할머니의 삶은 자손들의 증언을 통해 추상적으로 조합된다. 우리는 그녀가 겪었을 고통을 짐작만 할 뿐이다. 알랭 레네가 연출한 <히로시마 내사랑>(1959)의 그 유명한 첫 장면에서 여자가 “히로시마를 봤다”고 말하자 남자가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반박하는 것처럼 증언자들의 말과 몇 장의 사진, 몇 컷의 비디오 클립만으로 할머니의 삶과 고통을 재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다.

영화 매체가 역사적 진실에 다가서려 할 때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이 무기력을 감독은 어떤 방식으로 극복할 것인가. 그의 대답은 상처를 유추해 들어가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상처의 잔재, 그의 부모 세대와 그 자신에게 남은 미결의 아이러니들에 집중하는 것이다. 좌우 대립의 생채기는 과연 과거 완료인가, 라는 가설에 대해 그는 외가 마을의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가운데 그 상처가 현재진행형임을 확인한다.

다큐가 진행되면서 하나의 플롯이 슬쩍 제시되는데, 외할머니의 오빠를 총살한 장본인이 어머니의 어릴 적 친구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이다. 감독은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어머니가 친구를 만나 그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믿는다. 어머니는 아들의 부탁에 머뭇거리고 관객은 이들 모자가 가족사의 거대한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 봉합하게 될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 세대에게도 유효한 질문이기에 더욱 절절한 고민으로 다가온다.

나는 이 다큐를 보면서 문정현 감독의 어머니가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감독이자 아들에게 “너는 너무 나만 옳고 다른 이들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면서 “살아 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일침을 놓는 대목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반목과 대립의 역사로부터 배울 게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감독의 어머니는, 역사로부터 짊어진 치욕과 고통을 온몸으로 버텨온 외할머니의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중반에 감독이 자신의 부모님과 더불어 국가보안법과 미군 철수, 북한 핵문제 등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으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우습고도 씁쓸한 장면은, 이 다큐멘터리가 지닌 성찰의 진정성을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증명한다. 아쉽게도 내가 <워낭소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 성찰이, 그의 카메라 안에는 담겨 있었다. 이 영화의 선전을 기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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