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로 여겨질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 영화의 출연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에 대해선, 많은 상찬이 이어진 마당이니 따로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는 일은, 어쩌면 상영관에 불이 켜지고 화장실에 다녀온 뒤에나 한숨 돌리며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소름 끼치는 연기 뿐 아니라 극 자체가 갖는 흡인력도 대단하기 때문이다.
동명 연극의 원작자 존 패트릭 샌리가 직접 연출한 영화 <다우트>는 제목 그대로 ‘의심’에 대한 영화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건 사유하고 있는 내 자신이었다는, 데카르트의 그 방법적 회의가 가리키고 있는 의심이 아니라, 여기선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불신과 혐오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알로이시스 교장 수녀(메릴 스트립)는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가 지적했듯, 단지 플린 신부(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긴 손톱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며, 그가 차에 설탕을 세 개나 넣는 게 싫었던 것 뿐이다. 물론 보수와 진보라는 교육관의 보이지 않는 대립이 배경으로 작용했겠지만, 신념의 발현태가 행동이라면 알로이시스는 플린 신부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혐오는 제임스 수녀의 사려 깊지 않은 추측에 힘입어 플린 신부가 흑인 학생과 동성애적 행위를 했다는 의심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 의심은 플린 신부의 저항에 부딪히며 확신으로 증폭된다. 플린 신부의 입장에서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지만, 알로이시스 수녀의 입장에서는 근거가 충분하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관이다. 그녀는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를 보며 우리는 쉽게 플린 신부의 입장에서 분통 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상황을 연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근거 없는 직관에 휩싸여 살고 있는가. 혐오가 의심을 부르고,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비 논리적 상황을 얼마나 자주 목격하고 있는가.
싫은 건 그냥 싫은 것이다. 이유가 없다. 불과 1년 반 전에는 이게 다 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의심이 떠나지 않는다”며 제임스 수녀를 붙잡고 통곡하는 알로이시스 수녀에게서, 우리는 의심과 혐오를 지니고 살아가는 자의 불행을 절감한다. 그리고 나 역시 플린 신부보다 알로이시스에게 훨씬 더 가까이 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다우트>는 그 어떤 심리학 논문보다 더 냉철한, 잔인할 정도로 냉소적인, 우리 자신에 대한 심리 보고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