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완전히 가로수길 영화네!” <키친> 언론 시사를 마치고 담배 한 개비 피우는데 모 일간지 기자가 한마디 보탠다. “아유~뽀얗고 예쁘긴 한데 왠지 닭살이 돋는 이 기분은 뭘까?”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가로수길을 거닐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리고 거기 있는 몇몇 바나 레스토랑, 갤러리 같은 데를 기웃거려 보신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가로수길’ 영화라 칭한 그 기자의 의도가 어느 정도 감이 올지 모른다. 헌데 그 감은 사람에 따라 양가적일 수 있겠다.
우아하고 이국적이며 다채로운 먹거리와 볼거리, 치장 거리에 둘러싸여 있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겠으나, 그것이 삼각 멜로에 녹아 들어갈 때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러니까 우리의 관계조차 그렇게 우아하고 이국적이고 다채로울 수 있냔 얘기다. 말하자면, <키친>은 그런 질문에 시침 뚝 떼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영화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얼마전 개봉한 <아내가 결혼했다>와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일본 원작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적당히 뒤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힘입은 <꽃보다 남자>야 돈 많고 잘생긴데다, 적당히 콧대까지 높은 훈남 세례를 꿈꾸는 틴에이저적 판타지이니 그러려니 하겠으나,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된 한 여성의 양다리 로맨스를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로 치자면 <아내가 결혼했다>가 이 영화보다 백 배 더 흥미진진하다. <꽃보다 남자>의 감수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 성인 버전의 여성 판타지에는, 현실적 고민은 뒷전이고 우아한 미장센에 포장된 감정만 넘쳐 난다. 영화 속 대사를 빌어 질문하면, 도대체 그 놈의 감정이 뭔데?
자상한 친오빠 같은 상인(김태우)과 나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모래(신민아)는 우연히 만난 두레(주지훈)의 매력에 취해 우발적으로 몸을 섞는다. 쪼르르 이 사건을 남편에게 털어 놓을 정도로 순박한 그녀의 변명에 따르면, 그는 이상한 맛이 났고, 그와의 우발적 섹스는 순전히 햇볕이 너무 강했고, 몸이 갑자기 나른해졌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에로스의 작동은 그토록 신묘한 것이니까. 헌데 알고 봤더니 두레가 남편이 레스토랑 오픈 준비를 위해 프랑스에서 특별 초빙한 입양아 출신 요리사였던 것. 그리하여 세 사람은 한 집에서 위험천만하면서도 짜릿한 동거를 시작한다.
모래는 두레에게 끌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상인을 떠나고픈 것도 아니다. 게다가 두레와의 로맨스가 너무 달콤해서였는지 상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찾아올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럴 수밖에. 모래로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두 남자가 양쪽에 있으니 삼각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면 성이라도 바꿀 심정일 것이다. 이 두 남자는 왜 <줄 앤 짐>의 걔들처럼 쿨하지 못할까 고민스럽겠지만 한편으론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그리 뿌듯한 노릇은 아닐 것이다.
요리사인 두 남자의 직업을 매개로, 요리와 이성에 대한 감정을 병치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 속에서, 감정은 그러니까 입맛이다. 다른 말로 모래에게 상인은 정서적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메인 요리라면, 두레는 모래의 잠재적 감수성을 달콤하게 자극하는 디저트인 셈이다. 입맛이 제각각이듯 감정도 무죄라고 말하는 이 영화의 가벼움에는 알마니와 프라다를 동시에 갖고 싶은 욕망을 뽀얗게 포장하려는 트렌디적 전략만 엿보일 뿐이다. 예의 삼각 관계에 뒤따르는 상처와 갈등, 그리고 화해가 뒤따르지만 그 조차 다 녹은 아이스크림 위에 토핑을 얹는 듯한 요식행위처럼 보인다.
내가 남자라서 이런 유의 영화에 대한 가부장제적 관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바라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성 감독이 연출한 삼각 멜로에서, 이를테면 남자 작가가 쓰고 남자 감독이 연출한 <아내가 결혼했다>의 시선을 뛰어넘을만한 뭔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적어도 나는 이 영화의 태도가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익숙한 마초 영화보다 바람직한 것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2월 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