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감정은 입맛?

영화 이야기 2009. 1. 20. 21:02 Posted by cinemAgora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거 완전히 가로수길 영화네!” <키친> 언론 시사를 마치고 담배 한 개비 피우는데 모 일간지 기자가 한마디 보탠다.아유~뽀얗고 예쁘긴 한데 왠지 닭살이 돋는 이 기분은 뭘까?”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가로수길을 거닐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리고 거기 있는 몇몇 바나 레스토랑, 갤러리 같은 데를 기웃거려 보신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가로수길영화라 칭한 그 기자의 의도가 어느 정도 감이 올지 모른다. 헌데 그 감은 사람에 따라 양가적일 수 있겠다.

우아하고 이국적이며 다채로운 먹거리와 볼거리, 치장 거리에 둘러싸여 있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겠으나, 그것이 삼각 멜로에 녹아 들어갈 때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러니까 우리의 관계조차 그렇게 우아하고 이국적이고 다채로울 수 있냔 얘기다. 말하자면, <키친>은 그런 질문에 시침 뚝 떼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영화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얼마전 개봉한 <아내가 결혼했다>와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일본 원작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적당히 뒤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힘입은 <꽃보다 남자>야 돈 많고 잘생긴데다, 적당히 콧대까지 높은 훈남 세례를 꿈꾸는 틴에이저적 판타지이니 그러려니 하겠으나,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된 한 여성의 양다리 로맨스를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로 치자면 <아내가 결혼했다>가 이 영화보다 백 배 더 흥미진진하다. <꽃보다 남자>의 감수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 성인 버전의 여성 판타지에는, 현실적 고민은 뒷전이고 우아한 미장센에 포장된 감정만 넘쳐 난다. 영화 속 대사를 빌어 질문하면, 도대체 그 놈의 감정이 뭔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상한 친오빠 같은 상인(김태우)과 나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모래(신민아)는 우연히 만난 두레(주지훈)의 매력에 취해 우발적으로 몸을 섞는다. 쪼르르 이 사건을 남편에게 털어 놓을 정도로 순박한 그녀의 변명에 따르면, 그는 이상한 맛이 났고, 그와의 우발적 섹스는 순전히 햇볕이 너무 강했고, 몸이 갑자기 나른해졌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에로스의 작동은 그토록 신묘한 것이니까. 헌데 알고 봤더니 두레가 남편이 레스토랑 오픈 준비를 위해 프랑스에서 특별 초빙한 입양아 출신 요리사였던 것. 그리하여 세 사람은 한 집에서 위험천만하면서도 짜릿한 동거를 시작한다.

모래는 두레에게 끌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상인을 떠나고픈 것도 아니다. 게다가 두레와의 로맨스가 너무 달콤해서였는지 상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찾아올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럴 수밖에. 모래로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두 남자가 양쪽에 있으니 삼각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면 성이라도 바꿀 심정일 것이다. 이 두 남자는 왜 <줄 앤 짐>의 걔들처럼 쿨하지 못할까 고민스럽겠지만 한편으론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그리 뿌듯한 노릇은 아닐 것이다.

요리사인 두 남자의 직업을 매개로, 요리와 이성에 대한 감정을 병치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 속에서, 감정은 그러니까 입맛이다. 다른 말로 모래에게 상인은 정서적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메인 요리라면, 두레는 모래의 잠재적 감수성을 달콤하게 자극하는 디저트인 셈이다. 입맛이 제각각이듯 감정도 무죄라고 말하는 이 영화의 가벼움에는 알마니와 프라다를 동시에 갖고 싶은 욕망을 뽀얗게 포장하려는 트렌디적 전략만 엿보일 뿐이다. 예의 삼각 관계에 뒤따르는 상처와 갈등, 그리고 화해가 뒤따르지만 그 조차 다 녹은 아이스크림 위에 토핑을 얹는 듯한 요식행위처럼 보인다.

내가 남자라서 이런 유의 영화에 대한 가부장제적 관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바라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성 감독이 연출한 삼각 멜로에서, 이를테면 남자 작가가 쓰고 남자 감독이 연출한 <아내가 결혼했다>의 시선을 뛰어넘을만한 뭔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적어도 나는 이 영화의 태도가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익숙한 마초 영화보다 바람직한 것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2월 5일 개봉.

,
BLOG main image
3 M 興 業 (흥 UP)
영화, 음악, 방송 등 대중 문화의 틀로 세상 보기, 무해한 편견과 유익한 욕망의 해방구
by cinemAgora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187)
찌질스(zzizzls) (3)
영화 이야기 (702)
음악 이야기 (34)
TV 이야기 (29)
별별 이야기 (122)
사람 이야기 (13)
3M 푸로덕숀 (156)
애경's 3M+1W (52)
민섭's 3M+α (27)
늙은소's 다락방 (26)
라디오걸's 통신소 (1)
진영's 연예백과사전 (4)
순탁's 뮤직라이프 (10)
수빈's 감성홀 (8)

달력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NM Media textcube get rss DNS Powered by DNSEver.com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3 M 興 業 (흥 UP)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cinemAgora [ http://www.ringblog.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티엔엠미디어 DesignMyself!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