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걱정은 키아누 리브스가 다 하는 것 같다. <매트릭스>의 네오 때문에 구세주 이미지는 그의 전매 특허다.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도 그는 어떤 위협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우주에서 강림한 전지전능한 외계인으로 등장한다. 그가 하니까 왠지 자동연상 작용이 일어나면서 꽤 자연스러워 보이는 구석이 있다. 이 말은 거꾸로, 식상해 보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나는 후자였다.
키아누의 캐릭터만 식상했다면 덜 지루했을 일인데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식상하다. 왜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행성은 늘 뉴욕 맨해튼을 향하는지는 그러려니 하자(이 영화에선 거기 UN이 있어서 그렇다고 우긴다). 애써 지구를 위기로 몰아넣고, 온통 CG로 떡칠한 파괴의 향연을 선보여 놓고는, 막상 그 해결 과정은 참으로 싱겁다. (더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요 정도만 해두자.) 그 사이, 키아누 리브스와 제니퍼 코넬리의 입을 빌어 제법 육중한 문명 비판적 논쟁이 등장하지만, 사람들이 인간성에 대한 지루한 설교을 듣자고 이런 오락 영화를 고르는 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와 교훈이라도 얼마나 찰진 드라마 안에 녹여내느냐가 관객들을 감동 시킬 수 있느냐를 결정짓는 관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본 <지구가 멈추는 날>은 게으르다. 아니, 서툴다. 애초에 진심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구와 인류의 운명에 대한 걱정, 가족의 소중함과 인간성의 위대함 따위는 오락적 비주얼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로만 활용될 뿐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말을 아낄 일이었다. 새삼 <딥 임팩트>(1998)가 꽤 훌륭한 영화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12월 2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