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단편영화 촬영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팀블로그 '3M흥업'이 추진중인 '도전! 200만 원으로 영화 찍기'에 선정된 세 편 가운데 한 편의 2회차 촬영 현장에 불려 왔다. 배우 섭외가 여의치 않았는지 감독이 단역 출연 섭외를 나한테 한 덕택이다. 왠떡이냐, 싶어 냉큼 달려 왔다. 몇 해 전 <내츄럴 시티>라는 작품에서 2080년의 기자로 출연했다가 편집된 아픈 기억을 가진 나로선, 모처럼 찾아온 절호의 기회가 내심 반가웠기 때문이다. (실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중경으로 카메라에 담기고 있다.)

3M흥업이 지원한 200만 원의 단출한 제작비로 만들어지는 단편영화인만큼, 의욕은 충만하되 약간은 서툰, 아마추어적 분위기를 예상했던 나는,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왠만한 장편 대중영화 촬영 현장만큼이나 프로페셔널한 분위기가 감돌았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배우나 스탭들 모두 실제 영화 현장 경험이 있는, 현역 영화인들이다. 기껏 200만 원 가지고 어떻게 이 많은 프로들을 섭외했냐고 물었더니 눈빛 맑은 감독은 머쓱한 표정으로 웃는다. "대부분 노 개런티죠. 뭐." 나는 말했다. "미필적 고의의 노동 착취군요. 부디 입상하셔서 상금으로나마 사례하셔야 겠습니다." 많은 스탭들이 방송 드라마 현장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한국영화의 혹한기 속에서 그들의 식지 않은 열정은 부쩍 차가워진 겨울 바람의 스산함을 잊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며칠 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회의가 있어 갔다가 '한국영화 제작 활성화'를 위한 영진위 사업에 대한 얘기를 우연히 전해 들었다. 영진위가 2억 원 규모의 현물 투자를 하고, 영진위가 기출자한 영상투자조합이 편당 3억 원씩 부분 투자하는 방식으로 모두 10편의 영화 제작을 지원한다는 게 골자였다. 투자 분위기가 얼어 붙어 기획 개발이 끝났음에도 크랭크인을 못하고 있는 작품들에 윤활유를 쳐 굴러가게 만들자는 계획이다. 강한섭 위원장은 "10편이 촬영에 돌입하면 편당 제작 인원을 100명 씩만 쳐도 1천 명의 영화인들에게 일거리가 제공된다"고 이 프로젝트의 의의를 강조하면서도, "막상 추진이 용이하지 않다"며 아쉬워 했다.

사업의 추진이 원활하지 않다면, 메인투자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분투자를 먼저 결정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투자 관행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30-40억 원 이상의 제작비 규모로 기획된 영화들로선 당장 5억 원 규모의 추가 투자가 프로덕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만큼의 주요 변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프로젝트의 지원 대상을 좀더 명확하게 타겟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10억 원 안팎의 저예산 영화에 집중하자는 얘기였다. 저예산 영화의 경우, 영진위와 영상투자조합이 합자한 5억 원 정도만 해도 거의 메인투자에 맞먹는 수준이기에 실제 영화화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기 때문이다.

영진위의 한 관계자는 이같은 의견에 대해 "그동안 저예산 영화의 기본 관객 동원 규모가 채 2천 명에도 미치지 못한 상황에서 영상투자조합들이 과연 투자 리스크를 감수하려 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문제 제기는, 적어도 현상적으로 맞다. '저예산 영화=예술영화=지루한 영화=관객 안드는 영화'라는 등식을 전제로 했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실제로 공적 지원에 힘입어 만들어진 적지 않은 저예산 영화들이 그 등식을 충실히 입증했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그 과정에서 시나브로 '다양성 영화'는 우리에게 다양성이 있음을 자족적으로 확인하고 협소한 게토에서 소비되고 마는 일군의 영화들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다시피했다.

허나 돈을 적게 들이고도 충분히 장르적인 재미를 안겨주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10억 원 안팎의 예산으로 대중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작품을 창작할 수는 없는 것일까?  많은 영화인들이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최근 <영화는 영화다>나 <미쓰 홍당무> 등을 통해 그런 실증을 접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금의 한국영화 위기를 돌파할 새로운 키워드로 '저예산 대중영화'라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결국 이것은 '다양성'이라는 구호를 다시 외치자는 얘기가 아니라, 대형마트만이 아닌 구멍가게도 같이 먹고 살자는, 일종의 한국영화 생존 운동 차원의 주장이다. 마트가 아닌 동네 슈퍼에서 가끔 아주 기막히게 맛난 과일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돈이 적게 들어간 영화라도 기가 막히게 찰진 이야기를 만날 수 있고 대중적인 접점도 넓힐 수 있음을 확인해 보자는 얘기다.

물론, 막상 만들어진다 해도 '저예산 영화=흥행 안되는 영화'라는 시장적 편견은 극복해야 할 숙제다. 대규모 영화에만 유리하게 돼 있는 배급 환경도 걸림돌이다. 그러나 당장 내년에 극장에 내걸려야 할 적정 영화편수조차 보장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저예산 대중영화는 가장 효율적으로 시장 흐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원스>나 <주노>와 같은 흥행 사례가 왜 한국영화에서 불가능하겠는가.

글을 쓰는 와중에 감독의 디렉션이 떨어져 어설프게나마 '액션' 연기를 하고 돌아 왔다. 감독의 "레디 액션!" 소리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배우들과 스탭들의 눈빛이 정겹다. 이들 모두 영화판에서 오랫동안 먹고 살고 싶어한다. 나는 이곳에서, 그들의 생존이, 그러니까 영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분명히 우리의 문화적 환경에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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