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플 놀이 관전기

별별 이야기 2008. 11. 18. 00:11 Posted by cinemAgora

직업적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블로그를 통해 악성 댓글을 적지 않게 받는 편이다.(경향적으로 악플러들은 나같은 먹물 또는 타칭 전문가들을 매우 혐오한다.) 다짜고짜 느닷없는 욕설을 퍼붓는 이부터, 문장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다며 제법 준엄하게 논술 지도를 해주시는 분, 심한 경우 목숨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악플의 종류와 유형도 가지가지다. 얼굴과 실명을 알 수 없으니 어떤 분들이 그렇게 느닷없이 화가 잔뜩 나서 생면부지의 나에게 저주와 증오, 분노를 분출하나 궁금하긴 하다. 모 포털에 근무하는 분 얘기를 들어 보니 적지 않은 악플러들이 하루에도 수 백 군데를 돌아다니며 치고 빠지는 걸 즐기는 부류에 속한다고 한다. 지인 가운데 한 명은 악플로 하루를 보내는 친구에게 왜 그런 짓을 하냐 물었더니 그 순간만큼은 짜릿하다고 대답했더란다. 그래도 오프라인에서의 악플러가 어떤 공통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단언하기란 쉽지 않다. 악플을 달았다가 명예훼손으로 덜미가 잡힌 사람들 가운데는 멀쩡한 직업을 가진, 혹은 사회적으로도 꽤 인정 받는 위치에 있는 분들도 끼어 있음을 목격한 터이기에 더욱 그렇다.  

어쨌든 나는 익명 권력의 극단적 표현인 악플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따라서 나는 인터넷 실명제나 사이버 모욕제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이다). 현실 권력의 불합리함에 대응할 수 없는 무기력과, 그로 인한 분노를 품은 이들이 악플을 통해 그 같은 감정을 대리 배설하고 있다면, 현실의 모순을 바꾸지 않고 표현 방식만 제어를 하는 게 무소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내 관심사는 악플을 누가 생산하느냐가 아니다. 나는 가끔, 악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시스템이 또 다른 악플을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악플의 폐해를 강조할수록 거꾸로 그 익명 권력의 잠재력이 얼마나 큰 지를 강조하는 셈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누구나 더 큰 권력을 쥐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면, 언제라도 악플을 쏟아낼 준비를 갖춘 이들에게 이런 분위기는 경종이 아니라 오히려 응원가로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주워 들은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에 내 나름대로 악플의 확산 방식을 이해하는 데 제법 도움이 된 침묵의 나선 효과라는 게 있다. 여론 형성 초창기에 하나의 목소리가 만들어지면,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집단으로부터 이탈될까봐 두려워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를 꺼리게 되고, 그래서 처음의 여론이 점차 지배적 여론으로 고착되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로 인터넷 이용자 가운데 극소수만이 댓글을 달고, 그 가운데 또 극소수가 악플을 단다(필자가 운영중인 팀블로그 역시 댓글의 수는 총 방문자의 0.01%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침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악플에 일련의 통일성이 발견될 때,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상, 더 나아가 아젠다로 고양되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개념으로 집단 극화라는 것도 있는데, 온건한 의견이 점차 극단적인 의견으로 수렴되는 현상을 말한다. 침묵의 나선 효과가 지속되면 처음엔 스스로도 동의하지 않는 의견일지라도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동의하게 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얘기다. 악플 가운데 조선 놈은 이래서 안돼 따위의 질정 없는 자학적 혐오를 이해할 수 있는 이론도 있다. 자신만 빼고는 다른 모든 이들이 어떤 메시지로부터 부정적인 영향력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3자 효과가 그것이다.

배우 근영이 언론으로부터 기부 천사라는 찬사를 듣자마자 꽤 위악적인 악플 세례를 받았다. 차마 옮기는 것조차 추악스러운 무지몽매한 색깔론 공세의 타깃이 된 것이다. 그들이 만약 악플의 확산 시스템을 경험적으로 확신했다면 이번에는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침묵의 나선 효과나 집단 극화 현상을 의도했을지 모를 일이로되, 내 보기에 제 3자 효과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가 문근영의 선행을 띄움으로써 그들로선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그녀의 가족사적 배경까지 (그들만 뺀) 무지한 대중들 사이에서 정당화될 것이라는, 순진한 착각의 힘에 휘말린 셈이다. 그러니 역풍만 불렀다. 언제 색깔론을 즐겨 쓰는 이들이 시대착오적이지 않은 적이 있었냐만, 이번에 거꾸로 그들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는 좌빨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애써 먹물 티 내며 이 불가해한 코미디를 해석하려 들고 있지만, 종부세 하나로 일희일비하는 이들을 일거에 부끄럽게 만든 문근영이라면 필시 코웃음조차 흘리지 않았을 일이다.

FILM2.0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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