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디졸브도 아니고 컷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감기에 걸려 한참 고생중이다. 코도 맹맹하고 머리도 잘 안 돈다. 가을은 즐길 새도 없이 왔다가 수북한 낙엽만 남겨 놓고 벼락같이 줄행랑을 치고 있는 중이다. 칼럼을 써야 겠다고 컴퓨터를 켜 놓고 한참을 앉아 있어도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때는 의문이 든다. 내가 무뎌진걸까, 세상에 말할 만한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걸까. 분명히 지난 일주일을 정신 없이 달려 왔는데, 그 사이에 영화도 여러 편 보고 TV를 보며 낄낄 댔고, 사람들을 만나 한국영화의 위기에 대해 열띤 토론도 했는데, 왜 지금 딱히 발언할 게 떠오르지 않는걸까. 톺아보니, 세상에 우울한 소식이 겹쳐 흐를 때 가끔씩 찾아오는 무기력이다. 이럴 땐 그 어떤 것도 참신해 보이지 않는다. 좀처럼 감동을 얻지 못하고 모든 것이 지리멸렬해 보인다.  

계절과 무기력을 들먹이며 꽤나 센티멘틀한 시늉을 내며 말을 시작했지만, 실은 불안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먹고 사는 일 때문이다. 프리랜스로 전업한 뒤 운 좋게 방송가를 기웃대고 버텨 왔다. 그다지 비싸지도 않은 원고료, 그나마 제때 받는 경우도 별로 없는 인쇄매체에 비해 방송은 비교적 안정적인 먹거리를 제공해줬다. 하지만 요즘엔 이 동네 사정 말이 아니다. 공중파 불패 신화가 깨지고 수백 억 적자에 당혹해 하며 비상 경영이다 뭐다 말들이 많다. 금융위기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나는 그게 말 그대로 금융의 위기, 즉 돈 넘치는 동네에서 벌어진 동맥경화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결국 눈 앞의 상황으로 닥친 것이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방송국도 예외가 되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다보니 개편 철이 맞물리면서 잘려 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리 비싸지 않은 몸 값을 유일한 경쟁력으로 삼고 있는 나 같은 타칭 전문가는 아직은 안전 지대에 머물러 있지만, 언제 이 쓰나미가 나한테까지 불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시나브로 커지고 있는 것이다.


2년째 출연하고 있는 TV 프로그램의 MC가 최근 제작비 절감을 이유로 교체됐다. 교체 대상이 된 MC는 꽤나 열심히, 그리고 비교적 훌륭하게 그 프로그램에 임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계약직 진행자였다. 아쉬움이 컸는지 마지막 녹화를 마친 그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말이 좋아 프리랜스지 장돌뱅이처럼 떠도는 비정규직 신세인 나로선 그를 위로하자마자 개편에서 살아 남은 데 대한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쉰다. 어딜 가나 사는 게 이 모양이다.

최근 인기를 얻은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남달라 보인 것도, 어쩌면 이런 정서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곳 저곳에서 불려온 아마추어급 음악인들이 얼기설기 짜맞추 듯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반쯤 사기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지휘봉을 쥐게 된 마에스트로 강이 맨 처음 송옥숙을 향해 일갈했듯, 그들은 똥 덩어리불과했다. 그러니 세상의 온갖 편견이 쳐 놓은 높디 높은 장벽에 번번히 부딪히는 게 당연하다. 아파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베토벤 바이러스>에
감동받는 것은 클래식이라는 우아함과 사뭇 동떨어진, 그들이 겪는 비정규적 삶의 고단함에서 어떤 동병상련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처음에 그들을 업수이 여기던 강마에가 겉으로 드러내 놓지는 못하지만 결국 은근한 후원자를 자처하는 것 역시 그 스스로 정치적 목적에 활용될 뿐인 비정규적 삶이라는 면에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과 맞물린다.

얼마전 한 후배 기자가 시도 때도 없는 임금 체불에 불안정한 회사 사정 때문에 직장 다니는 게 고역이라고 털어 놓길래, 이런 말을 해준 기억이 다. 세상이 비정규적 삶을 강요하는데 어딜 가나 안정적 삶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호라는, 더 크게 세계화호라는 아슬아슬한 배 위에 올라타 있는 신세인데. 그렇다면 거꾸로 좀 가벼워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후배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며 예의 바르게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사실 그 말은 내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 같은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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