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그리고 '이리'

영화 이야기 2008. 11. 4. 11:33 Posted by cinemAgora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나는 얼마 전 블로그를 통해 곤욕을 치렀다. 블로그에 링크 해 놓은 한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서 모 가수를 버터 바른 목소리라고 내 지른 게 화근이었다. 요즘 그를 기억하는 이도 별로 없으니 댓글도 달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득달같이 달려온 팬들이 보란 듯이 수 많은 댓글을 달았다. 물론 칭찬은 없고 죄다 비난이었다. 조소와 비아냥으로 발언자의 무식을 성토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진심을 다해 읍소하는 분도 계셨다. 님의 발언으로 상처를 입었으니 사과해달라는 요구였다.

나 역시 댓글을 통해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론을 읊조리는 가운데 방어적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경우를 당한 많은 논객들이
무시 전술을 자주 구사함을 잘 알고 있지만 불행히도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름 열정을 다해 삭제와 맞글이라는 양날의 칼로 대항(?)하고 있던 차, 차라리 죽어라느니 자살을 권한다 등의 저주와 증오를 내뿜는 댓글들이 이어졌다. 태연한 척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상처 받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고 숭앙하는 존재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내 존재 자체를 일순간에 무가치함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넘어 아예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사람과 생각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절망스럽기도 했다.

데카르트가 말했던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하고 생각해 보니 생각하고 있는 내 자신의 존재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는 그의 논리를 이 경우에 적용시켜 봤다. 과연 누군가에게 상처를 낼 만한 발언을 했는지, 그들이 그 때문에 상처 받고 아파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봐도, 내가 인식하는 세상 속에 상처라는 심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내 가슴에 새겨진 생채기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내게 사과를 요구하신 분들께 사과했다.


그럼에도 내겐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 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근원은 무엇일까, 하는. 이것은 대중 문화 스타라는 문화 권력과 펜대를 쥔 자의 비평 권력, 그리고 팬덤으로 현상화된 집단 권력 간의 문제로 단순화할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우리의 잔인성에 대한 의문들.



내게 자주 먹먹한 통찰을 안겨줬던 장률 감독의 영화를 보러 갔다. 재중국 동포인 그가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촬영한 신작 <이리>였다. 다행히도, 거기서 최근 내 머리 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얻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실마리로 인하여 내가 어떤 근거 없는 희망에 차게 됐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장률은 늘 희망보다 절망의 나락을 보여주며 객석을 한숨 짓게 만드는 데 선수니까. 이번에도 난 한숨 지었고, 그 한숨 속에 우리가 봉착해 있는 이 소통 불능의 막다른 골목을 조금 더 측은하게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고나 할까.


영화 <이리>의 여주인공 진서는 머리가 좀 모자란 서른 살 여성이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친절한 박애의 실천가다. 거절 못하는 성격에 좀 모자란 것을 이용해 동네 남자들이 그를 탐하고, 진서는 자주 비정상적인 임신을 한다. 그녀는 유일하게 사랑하는 친오빠인 태웅과의 동침을 갈구한다. 태웅은 기만을 일삼고 약한 자를 착취하는 인간들이 저주스럽다. 그러나 그조차 저주와 증오를 양분으로 삼는 폭력의 시스템 안에 갇혀 있다.


31
년 전 벌어졌던 이리 역 폭발 사고의 상징성을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도를 통해 탐색하고 있는 <이리>는 말하자면, 거대한 폭력의 정글에 갇혀 서로를 물어 뜯는 이들을 담은 지옥도나 다름 없어 보인다. 이리 역 폭발사고는 잊혀졌지만, 살아 남은 자의 몸 속에 잠복한 그 참혹한 상처는 먹잇감을 찾아 배회하는 승냥이마냥 산 송장들을 물어 뜯는다. 장률의 시선은, 그 풍경을 측은하고도 처연한 마음으로 응시한다.


어쩌면 우리의 잔인성은 우리의 역사가 우리의 유전자에 새긴 근원적 상처에 의해 프로그래밍돼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뭐든 적과 아군으로만 분별하길 좋아하고, 시야는 지나치게 좁고, 게다가 유사 이래 가장 창대하게 이기적이 된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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