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부 센세, 나도 좀...<인더풀>

영화 이야기 2007. 7. 13. 16:13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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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종로를 어슬렁 거리다 스폰지 하우스에서 하고 있는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을 보러 갔다. 프로그램을 슬쩍 훒으니 왠 오다기리 죠 영화가 이리 많나 싶다. '차라리 오다기리 죠 영화제라고 하지 그래?' 괜한 질투심에 심통이 도진다. 오다기리라면, 턱에 난 점까지 사랑해 마지 않는, 그의 열혈 팬들이 쫙 깔렸으니 프로그래밍에 영향을 안미칠 수가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인디 영화라지만 흥행 안되면 가져다 트는게 무소용인 것이다.

뭘볼까, 시간도 많지 않아 딱 한 편만 볼 생각에 <인 더 풀>을 골랐다. 그런데 이 영화,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던 <공중그네>의 오쿠다 히데오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단다. 게다가 내용도 <공중그네>의 연장선에서 괴짜 신경과 의사 이라부가 주인공이라니 슬쩍 걱정이 앞섰다. 얼마전 그 책을 읽다가 도중에 던져 버렸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소설이 아니라 동화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피소드와 인물 설정이 작위적이어서 크게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같은 작가의 소설로 <남쪽으로 튀어!>는 좀 나으려나 했는데, 역시 몇 장 읽다가 같은 이유로 놓아 버렸다(최근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일본 작가들 가운데서는, 일상에 천착하는 요시다 슈이치나 가쿠타 미쓰요 같은 작가들이 내 취향에는 맞는다. 장르 소설 작가 가운데서는 요코야마 히데오가 괜찮았고).

여하튼, <공중그네>가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래, 그 책은 소설보다는 드라마로 보는 게 훨씬 나을지도 몰라." 영화로 만들어진 <인더풀>도 그런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선택한 셈이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이 영화, 꽤 괜찮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라부를 등장시킨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은 문체나 서사에서 크게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인물 설정은 매우 드라마틱해서 차라리 영화적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영화가 되고 나니 과연 독특한 휴먼 코미디로 완성이 됐다.

마츠오 스즈키가 연기한 영화 속의 이라부는 소설에서 묘사된대로 전혀 거구의 모습이 아니다. 더러 이라부의 겉모습이 소설과 다르다고 미스캐스팅이라고 주장하시는 관객들도 있던데, 영화가 소설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근거 없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힐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는 그가 재창조한 이라부를 즐기면 되고, 더 중요한 것은 장인의 수준을 보여주는 그의 과장된 코믹 연기가 역시 연극 무대에서 갈고 닦은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입증해 보인다는 점이다.

'연기 잘하고 싶어 하는 꽃미남' 오다기리 죠는 그 이미지에는 참 안어울리게도 발기 상태가 지속되는 희한한 병을 앓는 30대 이혼남을 연기했다. 발기된 것을 숨기기 위해 어정쩡하게 걷는 그의 모습이 참 웃기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이치카와 미와코는 가스를 끄고 나왔는지, 전깃불은 켜 놓은 채 외출한 건지 늘 걱정이 태산이라 다시 집에 돌아가 확인을 해야 속이 풀리는, 강박증의 소유자다. 다나베 세이이치는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 수영에 집착하는데, 그러다 보니 수영을 하고 싶을 때 못한다는 또 다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인더풀>은 원작의 의도대로 현대인 또는 도시인의 신경증 또는 강박에 대한 블랙 코미디다. 강박은 모두들 껍데기 속에 스스로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인데, 곧잘 환자를 이끌고 병원을 벗어나는 이라부의 처방은 일견 괴팍스러워 보여도, 결국 일리가 있다. 껍데기를 벗기고 알맹이를 직시하라는 것이다. 오다기리, 넌 좀 화를 낼 필요가 있다. 바람 피우고 떠난 아내에게 결국 화를 내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화를 내라. 이치카와, 얘는 어렸을 때 자신의 실수로 친구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잠재적 걱정이 강박을 만들었다. 그러니 친구가 안죽고 잘 살고 있음을 확인하면 된다. 그렇다면 수영 강박에 걸린 다나베는? 이 대목에서만큼 감독은 처방의 몫을 관객에게 넘긴다. 앞서 두 사람에 대한 이라부의 처방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에게 어떤 실마리를 제공해줘야 할지 추론할 수 있다. 내 처방은 이렇다. 일상의 스트레스에 용감하게 대면하라고. 물 속으로 도피하지 말고, 땅 위에서 맞서라고 말이다. 덤으로, 영화를 통해 나 스스로의 강박증에 대한 처방까지 얻을 수 있었다면, <인더풀>은 꽤 괜찮은 영화가 아니겠는가.

사실 일본 인디 영화 페스티벌에 오다기리 영화만 있는 건 아니다. 오카다 준이치와 우에노 쥬리 영화도 있다.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이나 <신동> <첫사랑> <카모메 식당> 등 볼만한 영화들이 수두룩하다. 이달 25일까지다. 색다르게 재미있는 영화를 볼 소중한 기회, 부디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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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자,신화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중그네를 읽고 혼자 낄낄거림에 익숙해져서 스폰지를 찾았지만
    인더풀이 상영하길래 돌아왔지요.
    인더풀은 전작보다 영~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서...
    영화는 괜찮은가 보군요...함 봐야겠다.
    근데 왜 하필 오다기리인거야...
    츠마부키 사토시의 샤방한 미소를 품고 있는 저로서는
    왜 메종 드 히미코의 배바지녀석이
    인기있는지 모르겠군요...ㅋㅋㅋ

    2007.07.13 17:57
    • BlogIcon cinemAgora  수정/삭제

      세대별 취향의 차이 아닐까 싶습니다. 츠마부키는 므흣하고 오다기리는 흐믓하죠. 제 입장에선 둘다 매력적입니다만...

      2007.07.15 22:25
  2. 은이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쓰신 분, 첨부터 끝까지 동감입니다.

    2007.07.13 19:04
  3. 날라리아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더풀도 공중그네도 에..심지어 면장선거까지 읽었답니다^^ 전 왠지 이라부보다는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공감이 가더라고요. 이제 일본에 온 지 2주. 한국에서보다 더 일본 영화를 보기 힘든...-.-;;;; 조만간 저도 자막없이 일본 영화를 볼 수 있길 바라며.

    2007.07.13 21:52
    • BlogIcon cinemAgora  수정/삭제

      오쿠다 히데오 소설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이라부는 사실 흥미를 돋우기 위한 판타지적 장치에 가까운 인물이고, 그의 환자들에게서 느낄 점이 많긴 하죠. 일본에서 좋은 경험 많이 하시길.

      2007.07.15 22:30
  4. zardo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다기리 조가 이라부센세로 나오는 줄 알고 이런 터무니없는 하고 제껴버린 영환데 보고 싶어지네요. 진정 멋있는 배우죠 잘생긴데다 연기까지 잘하니 참 ㅋㅋ
    그리고 그냥 덧붙이자면 남쪽으로 튀어는 은근히 무게있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진정 하고 싶었던 얘기는 2권에 있죠. 대한민국에서 스타 행세하는 386들을 떠올리며 되게 통쾌하게 읽었더랬죠.

    2007.07.2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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