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강자로 남는 길

별별 이야기 2008. 10. 18. 21:34 Posted by cinemAgora

영화진흥위원회 강한섭 위원장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다니고 있는 언론 대학원 수업 중에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 최근 몇 년 동안 인터넷을 통해 격렬한 논쟁이 불거졌거나 촛불집회와 같은 대규모 행동을 촉발시킨 사건들을 일별해 보니 그 안에서 유사한 공통점이 도출됐는데,
부당한 강자와 정당한 약자의 대립 구도가 형성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를 정치권으로 확대해 본다면, 이를테면 무현 전 대통령의 극적인 역전극이 펼쳐졌던 2002년 대선도 이 프레임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교수님은 들려줬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권을 쥔 뒤에도 보수 언론이나 그에 대한 공격 세력을 부당한 강자로, 스스로를 정당한 약자로 각각 위치 짓는 프레임 전략을 구사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는데, 꽤 설득력 있게 들렸다. 집권 초반만 해도 대규모 탄핵 반대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유효했던 이 대립 구도는,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최종 승리를 보장해 주진 못했다. 정당과 부당의 여부를 떠나 집권 말기에 이르러 국민들이 그를 더 이상 약자로 보지 않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최근 그가 개설한
민주주의2.0이라는 웹사이트나 봉하마을 사저를 둘러싼 논란도, 강자와 약자의 대립 구도가 역전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대뜸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최근 4기 영화진흥위원회를 둘러싼 영화계 내의 불협화음 속에도 이런 심리 구조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강한섭 교수를 새로운 수장으로 맞이한 영진위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영화계나, 한국영화의 침체기를 대공황으로 규정하며 지난 영진위의 실책을 다소 자극적인 어휘를 동원해 따져 묻는 강한섭 위원장이나 스스로를 정당한 약자로, 상대방을 부당한 강자로 포지셔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영화계
, 구체적으로는 충무로 주류 세력으로선 하필 정권 교체기와 맞물려 새로 구성된 4기 영진위, 구체적으로는 강한섭 위원장에 대해 처음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를 새로운 위원장 후보로 적극 밀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가 줄곧 한국영화 전반의 침체와 관련해 충무로 주류와 영화계 정책 세력의 책임론을 강도 높게 주장해 왔다는 점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라는 공식 행사를 통해
대공황이니 이너서클이니 투자펀드에서 냄새가 난다는 등의 다소 극단적인 어휘를 동원하며 책임론을 확인한 것은, 불씨 위에 기름을 얹은 셈이었다(당시의 구체적 정황이 궁금하신 분은 여기를 클릭). 뒤이어 한나라당 진성호 위원이 3기 영진위의 특혜 의혹을 제기한 데다 다양성 영화 복합상영관 예산이 2009년 영진위 예산에서 누락된 것도, 안 그래도 현 정부의 정치적 성향과 궁합이 별로 맞지 않는데다 강 위원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영화계 주류 세력에게 대반격의 계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17일 있었던 영진위 국감에서도 강 위원장은 이 문제와 관련해 호된 질책을 받았다.)


나는 양비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이 지점에서 영화계가 지금의 침체 국면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 지난 번 유인택 씨가 FILM2.0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대로 국민 앞에서 참회해야 한다는 소리를 되뇌이고 싶지는 않다. 설령 불합리한 정책과 머니 게임에 몰두하느라 도끼 자루 썩는 것을 지켜만 본 책임이 크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지금 정당한 약자를 자처하고 있더라도, 강한섭 위원장까지 정당한 약자의 프레임 안에서 함께 대거리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고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권이 바뀐 뒤의 첫 영진위 수장인 된 그가 마치 집권 초기의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난 영화 정책이 부른 부작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데
, 특히 스크린 독과점 문제와 관련해 강한섭 위원장과 어느 정도 뜻을 같이 했고 그가 주도한 포럼이나 기획 기고 활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문제 의식이 비교적 정당하며, 또 쓰지만 영화계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약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가 영화진흥위원장이 되기 전, 그러니까 정당한 약자였을 때의 상황이다. 분명하게도, 강 위원장은 이제 약자가 아니다. 지난 실패나 부조리를 따져 묻는 일보다 폐허 위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는, 더 막중한 책임에 골몰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영화진흥위원회가 할 일이며 강 위원장이 정당한 강자로 남는 길이다.

FILM2.0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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