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이라는 이름의 노예

별별 이야기 2008. 9. 20. 23:45 Posted by cinemAgora

오늘도 어김이 없다. 일상의 한가로움, 또는 몰입의 쾌감을 일거에 박살 내는 그 벨 소리. 예의 고객님! 저희 카드를 이용해 주심에 깊은 감사의 말씀 먼저 드리고요로 시작되는 그 과잉 친절의 목소리는 수화기 건너 이 쪽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고 싶은 얘기, 아니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멘트를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저기여, 저기여 일상을 사수하기 위해선 인간에 대한 예의는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다. 어쨌든 돈 쓰란 얘기죠? 죄송합니다만 쓸 돈 없습니다. 이 정도 반응쯤이야 이미 저들의 대응 지침에 나와 있을 터, 가장 효과 빠른 건 시간 없습니다. 의 방법론이다. 누군가의 전화를 시침 뚝 떼고 일방적으로 끊어버릴 때 찾아오는 왠지 모를 죄책감. 하기야 이런 보편적인 감정조차 저들의 마케팅 전략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제가 될 게 뻔하겠지만. 오늘도 나는 저들의 고객 리스트에 포획된 상황을 원망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소비의 신들은 집 구석에 틀어 박혀 있는 나를 애써 찾아와 도대체 당신은 소비하지 않고 왜 이러고 있냐며 윽박지른다.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을 울려대는 친절한 텔레마케터의 애원에서부터 여섯 달 무료를 미끼로 정기 구독을 간청하는 보수 신문의 방문에, 아파트 단지에 찾아와 산지 직송 굴비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살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고 외치는, 5.1 채널을 무색케 하는 엄청난 음역의 방송까지. TV라도 켤라치면, 공중파 채널 사이 사이에 끼어든 홈쇼핑 채널들에서 번지르르한 쇼핑 호스트의 구애가 이어진다. 현명한 소비자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머리를 쥐어 뜯고 있는 내 자신이 마치 분열증 직전에 당도해 있는 기분이 든다. , 나는 정말이지 현명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세상은 언제나 나를 고객으로 호명한다. 백화점이나 쇼핑몰, 은행 창구, 주유소 등 판매자들을 직접 대면할 때 말고도 세상과 통해 있는 사실상의 모든 매체를 통해
고객님~ 하고 나를 불러댄다. 그러니 지갑이 두둑하면 왕이라도 된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 역시 서비스가 기가 막힌 곳에 가면 가끔 붕 뜬 기분이 든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것은, 그 착시 현상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도 나와 똑 같은 왕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음식점이나 커피숍에 들렀을 때, 특히 명품 백화점에 갔을 때 별로 아름답지 않은, 안하무인의 태도들을 가끔 본다. 종업원을 마치 종 부리듯 대하는 이들은, 오로지 판매자와 소비자간의 권력 관계에만 집중하느라 인간에 대한 예의를 너무 쉽게 까먹는다. 그들은 고객으로 호명되는 순간, 배타적인 시민권자라도 된 듯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한다.


그러나 고객이라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선 감수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우선 나를 전방위로 포위하고 있는 무차별적 판촉의 공해를 묵묵히 견뎌야 한다. 텔레마케터의 언어를 어디까지 들어줄 것인가를 일상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지 않은 채 온 천지를 도배한 광고 세례에 나의 시청각적 환경은 온전히 저당 잡혀 있다.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선 무려 스무 편이 넘는 광고를 꾸역꾸역 보고 앉아 있어야 한다. 게다가 내 의사와 전혀 상관 없이 전화번호와 집주소, 생년월일 등이 상품 마케팅에 활용되는 현실도 무기력하게 참아내야 한다. 저들은 내가 주로 어떤 곳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지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 심지어 지난밤 연인과 어떤 호텔에서 뒹굴었는지까지도. 어느 정유사가 보유하고 있었다는 1천 만 명이 넘는 고객 리스트에 십중팔구 내 이름이 들어가 있을 게 뻔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
E>에 나오는 우주 유람선 엑시움에는 모든 것을 기계에 떠맡긴 인간들이 뒤룩뒤룩 살만 찌고 있는 걸 모른 채 홀로그램 영상에 온통 시선을 빼앗겨 살아간다. 엑시움의 인간들은 극상의 안락함을 누리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사실 누군가의 의지를 수행하는 노예들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그러므로 엑시움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항해하던 수 백년 전의 노예선을 연상시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안락의자에 누운 인간들은 마치 노예선에 돼지처럼 차곡 차곡 누운 채 실려간 흑인 노예들을 떠올리게 한다). 오로지 먹고 소비하는 의무만이 주어져 있으나 잔뜩 신격화된 인간들은 그것을 특권으로 착각한다.

일상적인 매체 중독증에 걸린 위대하고도 추레한 소비자
,  우리는 그저 고객이라는 이름의 노예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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