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가 새로 선보인 애니메이션 <월 E>는 로봇을 의인화하긴 했으나 고전적이고도 전형적인 러브 스토리의 공식을 따른다. 인간이 모두 떠난 지구에 홀로 남은 쓰레기 처리 로봇 '월 E', 초고층 빌딩 높이의 쓰레기 탑을 쌓아 올리며 여전히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지만 가끔 신기한 물건은 따로 수집하고 옛 뮤지컬 영화의 향수에 젖어들 줄 아는, 제법 로맨틱 가이다.
어느날 우주공간을 부유하고 있는 인간들이 지구에 파견한 탐사 로봇 이브(그들은 '이~바'라고 발음한다)를 만났으니 월 E는 이 둥글둥글하게는 생겼으나 제법 독하고 까칠한 여전사 로봇을 괜시리 사랑하게 된다. (로봇에게 무슨 사랑이냐는 질문은 이 영화에 통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 그 다음엔 어찌저찌 두 사람의 어드벤처 액션. 월 E의 헌신적 사랑에 힘입어 임무를 완수한 이브와의 짜릿하고 알콩달콩한 러브 로망의 향연. 그리고 귀엽도록 집착적인 청소 로봇 '모' 등이 선사하는 감초 웃음.
이런 고전적 러브 스토리의 주연을 로봇들에게나 맡긴 채 거대한 우주 유람선 '엑시움'에 탑승해 있는 인간들은 그야말로 산송장과 같은 생활을 이어간다. 최첨단 안락 의자에 몸을 누인채 움직이지는 않고 로봇들을 부리며 그저 먹기만 하니 죄다 살만 뒤룩뒤룩(이런 설정은 비만 공화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은유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인간들은 모두 24시간 홀로그램 영상이 전해주는 사이버 세계에만 몰두해 있다. 인간이 기계보다 더 단순한 삶을 영유해갈 때 주인공 로봇들은 한때 인간들의 몫이었던 질기고도 끈적한 사랑과 이타적인 헌신, 그리고 문화적 향유를 나눈다. 말하자면, 세상이 거꾸로 된 것인데, 디지털 문명이 선사하는 위장된 안락함에 갇혀 있는 인간들은 그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어이 없게도 그런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아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 된 기계들이다.
존재와 본질을 거꾸로 대입시킨 이 흥미로운 설정을 통해 <월 E>는 그 부피가 한 없이 얕아져 버린 인간 세상의 획일성을 제법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들여다 본다. 그리고는 컴퓨터 모니터와 TV 수신기, 휴대폰 단말기에 온통 시선을 빼앗긴 우리들을 부끄럽게 돌아보게 만든다. 디지털적 관계망 안에서 왜곡되고 사장되어 가는 인간 특유의 미덕, 고개를 들어 옆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의 체온을 느끼며 사랑을 나누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해 온 인간들의 유산. 그것을 다시 소환해내자고 은근히 부추기는 이 앙증맞은 문명 비판에 뒷통수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짓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