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헝가리를 꺾고 동메달을 확정 지은 순간, 모두들 환호했다. 선수들은 회환과 감격이 뒤섞인 눈물을 흘렸고 인터넷에선 격려의 글들이 쇄도했다.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겪어온 우여곡절과 와신상담의 사연, 평소 비주류 스포츠라는 이유로 홀대 받아야 했던 그들의 처지는 이 미완의 성취를 드라마틱한 감동의 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뛰는 선수나 바라보는 국민이나 그들의 동메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복합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어 어떤 언어로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그러나 인간사의 보편성을 관통하는 완벽하고도 더 없이 아름다운 드라마로 비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장면에 어떤 종류의 공식적 가치가 얹어지기 시작할 때 감동은 곧잘 정치적으로 소비된다. 방송국 아나운서는 흥분 섞인 말투로 "금메달보다 더 값진 동메달"이라고 했다. 이 말은 모순이다. 적어도 지금의 방송국이나 언론에서 사용할만한 적절한 수사가 못 된다. 은메달을 수십 개 따도 금메달 1개보다 순위가 낮은 게 한국 언론이 쓰는 메달 종합 순위 계산법이다. 그럼에도 "금메달보다 더 값진 동메달"이라고 말하는 건 당장의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편의적인 수사법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 말을 뒷받침하려면 메달의 색깔이 아니라 일찌감치 메달의 전체 획득 개수로 순위를 따지는 게 옳았다.

아무리 많은 수의 은메달이라도 감히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금메달은 절대화되고 신성시된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국사회의 일등 제일주의를 반영한다. 일등이 아니면 모두가 무가치하며 그 어떤 것도 인정받을 수 없는, 승자 독식의 패러다임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바로 그것이 유도의 왕기춘 선수가 은메달을 따 놓고도 "국민들께 죄송하다"며 눈물을 머금게 되는, 강박적 심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올림픽은 이미 국가간 가상 대결의 장이자 국력의 과시장이 됐다. 그래 놓고 언론들은 이미 박제가 된 올림픽 정신을 쉽게도 불러낸다.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우생순 신화 재연은, 그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미안한 얘기지만, 희미해진 올림픽 정신의 현시적 알리바이로 활용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올림픽과 그 올림픽을 활용하는 언론들은 그렇게 또 다른 의미의 상업적 물꼬를 터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움직임의 미학에 감탄하는 대신,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순위를 확인하고 얼싸안기 바쁘다. 그것이 정책 입안자들로 하여금 저 유치하고도 고색창연한 자축 퍼레이드를 불러낼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핸드볼은 여전히 비인기 종목으로 남을 것이고, 국민들은 여전히 축구 A매치에 열광할 것이다.

비단 올림픽과 스포츠뿐이랴. 영화진흥위원회의 홈페이지에는 지난 정부 시절부터 '한국영화, 세계 5대 강국 실현'이라는 전투적 모토가 걸려 있다. 이 말이 주는 구호적 의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세계 5위 이상이 되자는 소리렷다. 대관절 1위부터 4위까지는 어느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른다. 순위의 기준이 영화 산업의 매출 규모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화를 고민하는 정책 담당자들의 몰상식을 탓할 수밖에 없다. 한 나라가 가진 문화적 자산의 크기를 기껏 계산기로 두드려서야 알 수 있다는 얘기인가?

나는 영화에서만큼은 양적 비교를 반대한다. 우리나라가 설령 매출 면에서 세계 5대 강국이 된다 할지라도, 예술적 통찰력으로 시민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고, 얄팍한 상술로 관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영화들만 쏟아져 나오는 나라라면 진정한 영화 강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극장가에서 오로지 자국영화 아니면 할리우드 영화만 볼 수밖에 없는 나라라면 강국은 멀었다고 생각한다.

신문을 읽다 보면 우리 나라와 관련한 여러 종류의 순위들이 등장한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GDP 규모는 세계 13위다. 이것만 보면 꽤 잘 사는 나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인당 국민 소득의 순위는 한참 아래에 놓여 있다.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다. 행복지수는 100위권 밖이다. 놀라워라, 그럼에도 올림픽 금메달 순위는 7위다! 그래서, 모두들 행복하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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