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삼존불과 '맘마미아'

영화 이야기 2008. 8. 24. 23:39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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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수업 도중에 대뜸 나를 백제의 미소라고 불렀다. 교과서에 실린 사진 속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와 내 웃는 모습이 닮았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기분이 우쭐해져 수업 시간 내내 그 사진을 보고 또 보았는데, 정말 부처님의 미소는 귀엽고 싱그러웠다. 선생님의 말은 칭찬을 듣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던 고교 시절에 내가 들었던 유일한 칭찬이었기에, 나는 기회가 닿으면 꼭 마애삼존불을 뵈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서산에 간 것은 그로부터 10년도 훨씬 지난 뒤였다. 가을 나들이 삼아 서산에 들렀다가 드디어 마애삼존불을 만났지만, 실망이었다. 마애 삼존불은 웃고 있는 게 아니라 잔뜩 찌푸린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백제의 미소를 확인하지 못한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

간혹 어릴 적 가졌던 인상과 직접 확인한 순간의 느낌이 천양지차일 때가 있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때만 해도 넓디 넓어 보였던 학교 운동장이 어른이 돼 가보면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10년만에 눈으로 확인한 서산마애삼존불도 내게 그런 대상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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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시사회를 통해 본 영화 <맘마미아>는 스웨덴 그룹 아바를 다시 불러냈다. 아바의 곡을 개사하지 않고 그대로 쓰면서도 재미있는 소동극 한편을 만들어낸 이 작품은, 내게 두 가지 경이로운 재발견의 기회를 안겨줬다. 하나는 풍성한 연기의 폭뿐 아니라 춤과 노래에서도 녹록지 않은 내공을 과시한 대배우 메릴 스트립이었고, 또 하나는 아바의 주옥 같은 히트곡들이 안겨주는 정겨운 세련됨이었다
.

어릴 때 나는 아바를 그렇고 그런 팝그룹이라고 생각했다. 여기 저기서 하도 많이 틀어대 어딜가나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였는데, 특히 롤러 스케이트 장에 가면 어김 없이 Gimme Gimme Gimme가 흘러 나왔다. 나는 이 노래가 나오면 뜻도 모르는 가사를 대충 들리는 대로 따라 불렀다. 김미김미김미 매로삐마~. 헌데 영화를 보니 이 노래는 밤중에 같이 놀 남자를 달라는 도발적인 가사를 지니고 있었다. 매로삐마가 아니라, man after midnight이었던 것이다. 뜻을 알고 나니 스스로에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고 노래가 바뀐 것도 아닌데, 갑자기 아바의 음악 세계가 새로운 뭔가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70년대에 이토록 세련되고도 허랑방탕한 곡들을 만들어 부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멜로디의 독창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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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은 전설이 된다. 하나도 변한 것 없이 거기 그대로 우뚝 존재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그것을 달리 보이게 만든다. 매로삐마의 아바가 man after midnight의 아바가 된 것처럼 말이다. 어제의 아바와 오늘의 아바는 다르지 않지만, 분명히 아주 많이 달라 보인다. 사실, 달라진 것은 바라보는 주체, 즉 나일 뿐이다. 이런 사실을 일깨우는 순간, 누군가의 창작물에 대해 내 좁은 식견과 세치 혀로 함부로 나불대며 먹고 사는 내 직업이 부끄러워 질 때가 있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 서산마애삼존불을 가리고 있던 누각을 벗겨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삼존불은 그 특유의 오묘한 미소를 되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원래 웃고 계신 삼존불을 사람들이 가렸던 것이었음에도 나는 부처님이 웃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제야 부처님은 내가 교과서에서 봤던 바로 그 백제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다. 왠지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10년 만에 삼존불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고교 시절에 내가 들은 유일한 칭찬을 매개해준 그 미소, 원래 거기 있었으나 내가 찾아내지 못했던 그 위대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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