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될 말과 할 수 없는 말

별별 이야기 2008. 8. 20. 00:27 Posted by cinemAgora
말과 글로 먹고 살고 있지만, 나는 스스로 말 주변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무슨 얘긴고 하니,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고 살 때가 더 많다. 안해도 될 말을 굳이 해서 억하심정을 야기하고, 꼭 해야 될 말은 머뭇거린다. 이를테면, "미안해" 같은 말. 분명히 미안해야 할 상황임에도 이 말이 그렇게 하기 싫은 게 나도 뭐 달고 나온 남자라서 그런건지 몰라도, 아무튼 그 말을 입밖에 내뱉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

회사 있을 때는 "너 4년제 대학 나온 녀석 맞아?"라며 후배들의 염장을 부득부득 질러댔다. 내심으론 "좀 잘하자, 너 더 잘할 수 있잖아?"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입밖으로는 그런 언어들이 툭툭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돌이켜 보니 성장기의 환경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늘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입이 거칠었다. 남도 출신의 어머니는 사랑스러운 막내 아들에게 "씹어 먹어도 분이 안풀릴 새끼"라든가 "니기미 씨브럴넘아~"라는 육두문자를 주저 없이 날렸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참, 천박한 어머니여~"라든가, "왜 그런 새끼를 낳아서 이리 고생이야?"라며 대들었다.

내 기억 속에, 어머니와 나는 단 한번도 살가운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딱 한번, 나는 남의 집 옷을 짓느라 재봉틀을 돌리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참 측은해 보인다고 쓴 일기장을 괜히 스윽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그냥 "내 새끼" 하며 내 궁둥이를 툭툭 두들기고는 마냥 우셨다.
 
지난 주말 치매와 당뇨로 6년째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 상태가 많이 안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병원을 찾았다. 이미 수척해질대로 수척해진 어머니의 코에 산소 호흡기가 달려 있는 걸 보고 울컥해졌다.

나는 이미 초점이 사라진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꾸역 꾸역 말했다. "엄마, 잘 살았어, 잘 살아왔어, 이렇게 훌륭한 아들도 낳고 말야." 어머니는 말이 없다가 내가 "그치?"하고 물으니 희미한 목소리로 "응'하고 대답한다. 그 순간, 나는 차라리, "저 잡녀러 새끼"하던 어머니의 우렁찬 욕설이 그리워졌다.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 말 한마디를 못한다. 어머니의 숨이 끊기기 전에 그 말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두고 두고 곱씹는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을 끝내 못할 것 같다. "잘 살아 왔어"라는 내 치사한 언어 속에서 어머니가 그 마음만이라도 읽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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