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는 늘 이긴다

영화 이야기 2008. 8. 18. 09:18 Posted by cinemAgora
 스포일러 다량 함유, 영화를 보신 분들에게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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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정신이 아찔해지기는 처음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걸작 <다크 나이트> 얘기다. 이런 블록버스터급 오락영화 안에서, 이를테면 <데어 윌비 블러드> 를 보고 나왔을 때와 같은 묵직한 느낌을 얻는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나는 특히 투페이스의 변절과 더불어 극적 상황을 다중의 윤리적 게임으로 몰고 가는 후반부에서 거의 자지러질 뻔 했다.

조커는 배트맨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병원을 폭파시키겠다는 위협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김으로써 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다. 그는 공포심에 빠진 인간들이 쉽게 나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정의? 그 따위는 개에게나 줘버리라고 말하듯, 그는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증명하려 든다. 그 증명의 행위들은 물론 그의 맞수이자 서로의 얼터 에고인 배트맨을 향한 것이다. 마침내 그가 꺼내든 회심의 카드는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정의의 수호자 배트맨을 순식간에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

조커는 시를 빠져 나가려는 두 척의 배에 폭탄을 설치하고 자정이 되기 전 상대방의 배를 폭파시키는 쪽을 살려주겠다고 선언한다. 흥미롭게도 열쇠는 배트맨이 아닌, 배에 타고 있는 시민들이 쥐고 있다. 그러니 이 순간, 크리스토퍼 놀란이 배트맨의 활약을 제쳐두고 배 안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게 당연한 노릇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한 배에는 일반 시민이, 그리고 나머지 한 배에는 죄수들이 타고 있다. 공포에 휩싸인 채 딜레마에 빠진 시민들은 다른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이 죄를 지은 이들이니 죽어도 덜 억울할 것이라는 정당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쉽지 않은 정당화다. 생명의 등가성 앞에서 누구도 누군가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근거를 만들어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익숙한 방식대로 투표도 한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답은 시민들의 양심, 그들의 윤리적 판단에 있을 뿐이다
.

만약 이 게임에서 조커가 승리했다면, 그러니까 누군가가 다른 배의 승객들을 폭살시키겠다고 결정하고 실천에 옮겼다면, <다크 나이트>는 더 이상 슈퍼 히어로물이 아니라 더 없이 우울한 염세주의적 누아르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놀란은 이 작품이 흥행을 포기한 컬트 영화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는지 인간성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내려 놓지 않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내게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에 근거한 희망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린, 자위의 몸부림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 처연했다. 우리가 이런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면, 삶이란, 우리가 발 딛고 선 세상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라는 역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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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에 전율하며, 나는 뜬금 없게도 얼마 전 끝난 시교육감 선거 결과를 떠올렸다. 강남 지역과 비강남 지역의 선택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 그 우스꽝스러운 풍경에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 사회의 어떤 정서가 읽혔기 때문이다. 부모의 학력과 재산 수준을 바탕으로 자녀의 신분 상승 가도에 우월적 위치를 독점적으로 확보하려는 기득권층의 정서야 그렇다 쳐도, 그러한 정서가 투표라는 공공적 절차를 통해 이 사회의 보편적 집단 욕망으로 드러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

슬프게도, 내 눈에 그 선거에서는 조커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더욱 답답한 것은, 현실 속에서 조커는 자주 승리를 거둔다는 점이다. 근거가 없다 할지라도 뉴타운 개발 공약이나 특목고 유치 공약이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약발이 센지, 지난 총선결과가 입증해 보이지 않았던가. 내가 먼저 폭파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면 저들이 누를 것이라는 공포감은, 승자 독식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이 치열한 경쟁 사회의 주요한 심리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조커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실용과 효율성을 명분 삼은 약육강식의 좁은 우리 안으로 시민들을 손쉽게 몰아 넣는다. 시민들이 우리를 탈출할 궁리보다 서로를 잡아 먹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믿는 조커들은 오늘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음 게임을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젠장, 배트맨은 정녕 죽은 것인가, 아니면 그도 투페이스가 돼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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