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전 없이 '선빵' 날리는 사회

별별 이야기 2007. 6. 26. 07:15 Posted by cinemAgora

몇 해전 '신주쿠 양산박'으로 잘 알려진 재일 교포 김수진 감독이 연출한 <밤을 걸고>(양석일 원작)라는 영화를 영화제에서 본 적이 있었다. 국내 제작사 싸이더스가 제작에 참여한 한일합작영화였는데, 병기 공장의 고철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 재일 교포 1세대들의 삶과 역경을 드라마틱하게 담아낸 수작이었지만 끝내 국내에서 개봉하진 못했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묘사된 재일 교포 1세대들의 곤궁한 삶은, 그야말로 다이내믹 그 자체였다. 그들은 툭하면 악다구니를 쓰면서 싸우는데, 나는 왠지 그들이 싸울 때의 상황 묘사에 대해선 쉽게 동의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관계자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 이 영화 속의 재일 한국인들이 싸우는 방식은 전혀 한국적이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관계자: 무슨 말입니까?
나: 한국인인데 일본사람 방식으로 싸운다는 얘기에요.
관계자: 일본 사람 방식은 뭐고 한국 사람 방식은 뭡니까?
나: 한국 사람은 싸울 때 대개 탐색전을 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죠. "에이 씨발!" '뭐 씨발" 너 몇살이야 새꺄" "너 만큼은 먹었어" "야, 너 같은 손자가 있다, 자꾸 까불면 죽는 수가 있다" "그래 죽여 봐라 죽여봐" "어쭈, 이 자식이 정말 죽고 싶나."
관계자: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은 달라요?
나: 일본 사람이 실제로 싸우는 걸 본적 없지만 적어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바로는 말이죠. 가만히 앉아서 부글부글 속 끓이다가 난데 없이 일어나서 "빠가야로!"하고 막 패잖아요. 근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싸우질 않는다는 거죠. 한국인들은 싸우되, 누군가 말릴 시간적 여유를 벌죠. 그래서 결국 멱살잡이까지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쪽으로는 서로 파국을 피하는 거죠.
관계자: 듣고 보니 그러네요.

하지만 요즘 난 몇해전 했던 그 이야기를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요즘 같아선 우리도 일본식으로 싸우는 게 보편화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탐색전을 필요로 하지 않고 곧바로 '선빵' 날리는 방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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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이 선빵이라는 것도 맥락은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권상우)가 선도부장하고 옥상에서 '다구리 붙을' 때 보여주 듯, 선빵은 상대방이 방심한 사이 허를 찌르는, 일종의 약자적 전술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경우 역시 탐색전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은 이미 싸움에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상황이기 때문에 선빵은 대결의 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선빵은 선전포고가 아예 생략돼 있다는 점에서 당혹스럽다. 그러니까 그냥 '다짜고짜'이고, '느닷없이'며, '질정 없는' 공격 개시인 것이다.

하나의 사례. 나는 방송 녹화를 위해 매주 부산행 KTX를 타는데, 누군가 시끄럽게 떠들거나 핸드폰 통화를 큰 목소리로 해서 빈축을 사는 장면을 목격하곤 한다. 그런데 그 빈축이 결코 빈축에 그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번은 40대 중년 아저씨가 외국인들과 함께 타서 한창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뒷좌석에서 또 다른 중년 아저씨의 성마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빵이었다.

"거기, 조용히 해~! 조용히좀 하란 말이야! 여기 당신들밖에 없어? "
다짜고짜 반말에 적잖이 당황한 잉글리쉬 스피커의 반격,
"아, 사업차 그러는거니 양해를 좀 구합니다."
그러자 두번째 공격이 들어온다.
"양해는 무슨! 그렇게 잘 났으면 헬기를 타! 대한민국에 영어 못하는 사람 있어? 요즘 영재 교육이다 뭐다 해서 다 영어 해, 뭔 기차에서 그리 잘난 척이야!"
호통 개그 박명수가 열차 안에도 있었다.
그 순간, 난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윽박지르는 당신이 더 시끄러워, 빠가야로~칙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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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또 선빵 날리는 대자보를 붙이셨다. 누군가 음식물 쓰레기를 대충 슬쩍 갖다 버리는 얌체짓을 했나 보다. 그런 얌체족들을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사회 정의적 복수심에 불타셔서 그랬는지, 맞춤법 무시야 그렇다 해도, 험한 말투도 모자라 '개'라는 단어에 동그라미까지 그려주시는 센스! 누군가 그 밑에다 '이렇게 쓴 당신이 더 문제'라고 나름 반격하셨는데, 덕분에 우리 동네 엘리베이터는 시민 대자보판으로 돌변했다.

요즘 우리 사회는, 탐색전이 사라진 것 같은 분위기다. 이웃집 인테리어 공사 소음이 시끄럽다고 올라가서 칼로 찔러 죽이는 사회다. 시비만 붙었다 하면, 일단 선빵 날리고 보는 게 장땡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누군가는 그랬다. 한국에 총기가 허용되면, 하루에도 몇 건씩 총기 사고가 날 거라고. 끼어드는 차량 다시 앞질러 세워 놓고 총으로 빵!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을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인터넷에는 막글(막말하는 댓글)이 횡행한다. 얼굴 보고는 절대로 이렇게 말하진 못할거라 생각했지만 요즘엔 생각을 고쳐 먹었다. 이 분들, 면전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 가끔 무섭다.

얼마전 막글에 상처 받은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과 관련, 한 TV 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교수가 미국의 초등학교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면서 우리 사회도 증오 행동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스스로 자제하고, 또 누군가의 증오 행동이 자신에게 미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그 이론에 따르면, 증오 행동에 대한 일차적 대응은, '무시'라고 한다. 그냥 무시하라는 거다. 증오 행동을 일삼는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반응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므로 무시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는 얘기였다. 막글에 몸 사리는 연예인들이 새겨 들어야 할 얘기다. 나 역시 막글에 대응해 곧잘 써먹는 방법이기도 하다. 효과 있다.

탐색전이 생략된 싸움, 막무가내 저주가 판을 치는 사회는 으슥하고 험악하다. 상대방을 대상이 아니라 순식간에 적으로 간주하는 습관이 몸에 익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만큼 공포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실례를 범했다면 생까지 말고 죄송합니다, 하자. 누군가 내게 실례를 범했다면  저, 죄송한데 그렇게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부탁하자. 일찌기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은 일갈했다. 우리 사람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제발이지, 우리 선빵을 날리더라도 탐색전을 건너 뛰지 말자. 누군가가 말려줄 시간을 벌자. 인류가 역사를 통해 축적한 지혜를 하루 아침에 까먹지 않도록,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시간을 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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