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에 대해

영화 이야기 2008. 7. 11. 12:05 Posted by cinemAgora
관객들은 영화 관련 글에서 스포일러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영화 줄거리를 조금이라도 자세히 설명하면 발끈하기 일쑤다. 심하면 무슨 반역자가 된 듯한 취급을 받는다. 누군가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고 나온 길에 줄 서 있는 관객들을 향해 '범인은 절름발이다!'라고 소리친 뒤 도망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스포일러를 끔찍해 하는 문화를 골탕 먹이는 일종의 도발적 해프닝이었던 셈이다.

이런 현상은 관객들이 이야기의 예측불가성을 즐기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등장 인물의 운명은 새옹지마의 우리 인생을 닮았기에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그들은 영화 속 삶의 질곡이나 운명적 미궁에 빠져 버린 인물의 행보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은 마치 상투어처럼 "과연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라는 의문형으로 끝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영화를 먼저 보고 글을 쓰는 입장에선 어디까지가 스포일러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애매모호할 경우가 많다. 누가 어떤 역할을 맡았고, 그는 어떤 성격의 캐릭터이며, 이야기의 단초는 무엇인지 정도를 설명한다고 해도, '스포일러'라고 대뜸 화를 내는 독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한테는 예고편조차 스포일러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어진다. 이러다 보면 아예 모든 글에 '스포일러 있음'이라는 표시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내 경우엔 이미 영화의 줄거리나 반전을 안다고 해서 영화 보는 쾌감이 반감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줄거리의 얼개를 알고 보기에 영화의 다른 미덕을 찾아낼 여지를 얻게 된다. 한 영화를 두 세번 이상 반복해서 관람한 관객들이라면, 그런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렇다고 스포일러 민감성 관객들을 무턱대고 힐난할 생각은 없다. 영화를 조금이나마 흥미진진하고도 설레는 기분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을 왜 이해하지 못하겠나. 게다가 영화 관련 기사들이 개봉 전에만 집중돼 쏟아져 나오는 것도 관객들의 스포일러 알레르기를 키운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먼저 많이 보여주나 경쟁을 펼치는 공중파 영화 소개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반면, 대박급 흥행작이 아닌 이상, 개봉 이후 관객들의 평가가 어느 정도 형성된 다음에는 그 어떤 담론도 만들어지지 못하는 게 한국 영화 언론의 현주소다.

이런 사정을 다 감안한다 하더라도, 웹을 여행하는 독자들 역시 어떤 종류의 사전 정보가 영화에 대해 어디까지 담아내고 있는지에 대한 경험적 체득을 통해 정보를 단계별로 선별해 보려는 노력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그냥 영화의 단순 스펙을 알고자 하면 포털 영화 정보 페이지를 두들겨 보면 된다. 개봉 전의 영화가 볼만 하냐 아니냐를 따지고 싶으면 영화 전문 매체의 20자 평이나 손가락 평점을 보면 된다. 전문가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네티즌 평점을 참고하면 될테고.

그러나 굳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피력한, 조금 긴 글을 읽을라 치면 어느 정도는 원하지 않는 정보를 접할 수도 있음을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글을 쓰는 입장에선 최대한 영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 수집된 정보를 가능한 많이 활용하고 싶어하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캐주얼하게 생산되는 글은, 그 특성상 독자를 소비자로 위치 지우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특히 블로그 글쓰기에선 더욱 그렇다. 글쓴이의 자의식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영화의 절정부에 대한 단상, 혹은 반전에 대한 감상을 적고 싶은데, 스포일러가 될까봐 두려워 쓰지 못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다른 관객들에 대한 배려를 위해 영화의 가장 핵심적 장면을 놓고 토론하고 싶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추스려야 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누군가는 개봉 뒤에 쓰면 되지 않겠냐 하시는데, 개봉 뒤에도 그 영화를 못 본 분들에게는 여전히 스포일러가 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영화를 안본 관객들을 위해 죽을 때까지 입 틀어 막고 있으란 소리나 다름 없다. 가끔 영화 글에 대한 과민한 스포일러 짜증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익명의 검열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서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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