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티드'에서 사라짐의 미학을 보다

영화 이야기 2008. 7. 4. 11:03 Posted by cinemAgora

*스포일러가 가득한 글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만 읽기를 권합니다.

영화 <원티드>는 끝내주게 재미있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총알이 직선으로 날아간다는 물리적 고정 관념에 반기를 드는 역발상은 얼마나 참신하고 놀라운 것인가. 그것은 <매트릭스>의 네오가 선보였던, 그 유명한 '불릿 타임'의 시각적 충격을 능가할만한, CG 미학의 압권이라고 불러도 과찬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총알이 커브를 틀어 날아갈 수 있다는, 가상의 물리학을 제시하는 이 영화의 창의적 비주얼은 내게 단순히 신기해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이 영화가 가르키는 방향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그것을 '전복'이라는 코드로 읽고 싶었다. 고정 관념에 대한 상상력의 전복, 낡은 것에 대한 새로운 것의 전복, 또는 억압자에 대한 피억업자의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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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제임스 맥어보이)가 자신을 괴롭히는 직장 상사와 애인을 가로챈 동료에게 한방 먹이는 과정은 성장과 극복의 플롯에 따라 만들어진 주인공의 개인적 전복이므로 차라리 지극히 전형적으로 보인다.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두가지 대목이었으니, 암살단의 조직원들이 모두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과, 그 운명에 순응하는 폭스(안젤리나 졸리)의 위대한 결단이 결행되는 순간이다.

암살단원들이 모두 정의로운 사명감에 불타는 인물들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그냥 그 일을 하게끔 돼 있는 사람들이다. 암살단이란,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는 하지만 지극히 사적인 응징을 통해서만, 그것도 살인이라는 폭력적 방식을 통해서만 기능하는 집단이다. 게다가 임무를 수행하는 킬러들은 자신의 총알이 박힐 인물이 어떤 악한 짓을 했는지도 모른 채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그것은 이 조직의 치명적인 모순이다.

웨슬리는 이런 모순에 아주 잠깐 의문을 제기하지만 힘에 대한 욕망에 압도된 그는 무적의 킬러로 성장한다.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암살단이 가지고 있는 숙명적 모순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한 암살단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자신을 만든 숙주를 파괴하려 드는 그의 행동은, 역시 암살단원이었으면서 암살단의 정당성을 회의한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것임과 동시에 정의를 세우려고 조직됐지만 더 이상 정의롭지 못하게 된 구악(舊惡)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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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구악을 제거하는 장본인은 방금 전까지 그의 반대편에서 총구를 겨누고 서있던 폭스다. 진실이 드러난 순간, 폭스는 주저 없이 그의 동료와 그 자신의 관자 놀이를 향해 360도 회전 총알을 발사한다. 그리고 장렬하게 사라짐을 택한다. 총알이 차례 차례 단원들의 머리를 관통한 뒤 폭스를 향해 돌진하기 직전,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평정심의 자태를 보라. 그리고 마침내 총알이 그녀의 머리를 관통하는 순간, 감독은 이를 웨슬리를 중심에 둔 화면의 흐릿한 중경으로 처리함으로써 그 숭고한 결단에 역설적인 찬미를 바친다.

암살단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들의 임무는 끝났다. 조직의 리더 슬론(모건 프리먼)은 그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현재의 힘을 수긍하려 든다. 그러나 폭스는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전복을 완성한다.  

모든 낡은 것들은 처음에는 새로운 것이었다. 모든 부당한 것들은 처음에는 정당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러 낡고 부당함은 운명적으로 폐기의 순간을 맞는다. 그래야 역사가 진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기득권자가 된 그들은 저항한다. 이미 얻어진 현실의 힘을 바탕으로 모든 전복의 시도를 부당한 것으로 몰아 붙인다. 외부의 것을 적대시해야 자신의 부당함이 가려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슬론이 웨슬리를 키워 놓고 그를 악의 축으로 몰아 '실용적으로' 제거하려 드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원티드>를 보면서, 우리의 답답한 현실이 중첩됐다. 사라짐을 안타까워 하는 저 몸부림들의 향연, 보수를 사칭한 기득권의 발악이 떠올랐다. (우이독경이겠지만) 왠지 그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다. 슬론을 닮지 말고 폭스를 배우시라고. 정의로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사라짐의 미학을 실천하는 폭스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보수가 아니겠는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mairin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티드에 대해서 블로깅되어 올라오는 글들의 평이 대체로 나빠서 '나만 재미있게 보았나~?' 싶었는데.. 제 생각을 정리할수 있는 글이라서..
    재미나게 공감하고 갑니다!^^

    2008.07.04 17:57
  2. 새벽  수정/삭제  댓글쓰기

    솔직히 다른 블로그에 보면 영화평이 그리 좋지는 않아서 기대는 안했었는데 실제로보니 정말 재밌더군요.
    제임스 맥어보이의 무기력한 모습과 나레이션...무진장 두들겨 맞는 부분에서 파이트클럽의 에드워드 노튼이 살짝~엿보이기도 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트릭스..ㅋㅋ
    아무튼 맥어보이의 마지막 대사도 통쾌했고, 올해본 헐리우드 영화중 제일 시간가는줄모르고 재밌게 본거 같습니다.

    2008.07.04 21:47
  3. 은빛소망  수정/삭제  댓글쓰기

    윤리의식이나 리얼리티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시각적인 즐거움에 올인한 영화라고나 할까요? ^^ 한가지 미덕이 충만했으니 불만은 없었어요~ 좀 놀았던 언니 졸리의 포스는 참 대단한듯!! 그리고 화끈한 액션도 액션이지만 ATM 화면에 나타나는 대사나 키보드가 튕겨나오면서 만드는 글자의 조합 이런 게 참 신선했습니다

    2008.07.06 16:56
  4. 여자,신화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려한 락음악과 쌍권총이 발라진 반칙왕같은 느낌을 받았지요.
    사직서를 양복주머니에 넣고 꺼낼까말까 망설이는
    현대 사회인들이지만
    영화는 픽션이라는 장치로 과감하게 질러버리더군요.
    야효~!
    즐기는 쾌감과 졸리언니의 뒷태에 침 질질질...ㅋㅋㅋ

    2008.07.06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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