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국면이 지속되다 보니 요즘 택시만 탔다 하면 정치 토론이다. 촛불 집회 덕분에 저녁 시간대 4대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꺼려 하는 기사 아저씨들의 짜증도 이만저만이 아닌 듯 싶다. 툴툴 거리는 그 분들의 말씀에 십분 이해한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다가도 얘기가 좀 진행되다 보면 그 분의 짜증은 다른 차원의 짜증으로 나에게도 전염되기 일쑤다.

택시 안 라디오를 통해 이명박과 히딩크의 리더십을 비교하는 뉴스 논평이 흘러 나왔다. 대뜸 버럭 육두문자를 쏟아내는 기사분, "개새끼들, 한 나라의 대통령을 기껏 축구 감독하고 비교해?" "안될 건 없지 않나요?"라고 말했다가 본전도 못챙겼다. 목적지에 다다르기까지 기사분은 그래도 한 나라의 통치권자를 이렇게 모욕해서는 안된다는 논지의 말씀을 침을 튀며 이어갔고, 나는 '에궁 또 잘못 걸렸다' 싶어 그냥 들은척 만척 했다. 다짜고짜 통치권자를 모욕하는 짓이야 현 정권과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조중동이 가장 먼저 개발해낸 신공이 아니던가. 아마 그 분도 작년 이즈음엔 '놈현 개새끼'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을 게 분명하다.

또 얼마전 탄 다른 택시 안에선 이런 대화가 오갔다.

기사분: 이명박 찍어준 사람으로서 저도 참 실망이 커요. 강부자에 고소영에 저런 식으로 정치 하면 안돼지.
나: 그러게요. 사실 그 양반의 정치적 입지가 그쪽에 닿아 있다는 걸 간과하고 찍어준 유권자들도 전 한심하다고 봅니다.
기사분: 그러려니 했지만 그럴 줄은 몰랐지.


여기까지는 아슬아슬 그럭저럭 대화 모드.

나: 이러다가 MB 정권이 일찍 끝나 버릴 수도 있겠어요. 탄핵이라든가 하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분위기잖아요?
기사분: 이 정도면 정치를 계속 못한다고 봐야지. 양보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나: 누구한테 양보를 해야 할까요?
기사분: 누구긴 누굽니까. 박근혜 씨죠. 박근혜씨는 잘할거야.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면.
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명박 찍어놓고 취임 100일만에 후회하시면서 또 그런 말씀을 하세요?
기사분: 손님은 박근혜를 몰라서 그래...예전 박통 때 말야.


그 뒤 몇마디는 많이 듣던 레퍼토리라 굳이 옮기지 않겠다. 여하튼 내가 정색을 하고 대들면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 모드로 돌변했다. 참고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데올로기 뒤에 숨은 박통적 독재(=유신 폭력)의 실체를 나는 매우 증오한다.

아무튼 이처럼 가끔 우리 사회의 서민층, 그것도 매우 퍽퍽한 삶의 조건을 감내하고 계신 분들로부터 배 부른 이들이 수십년간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었던 논리를 그대로 전해들을 때 절망감이 몰려온다. 그들은 왜 자신이 서 있는 계층적, 혹은 경제적 이해 관계와 상반된 정치 세력을 지지하고 그들의 정당화 논리를 서슴 없이 내면화하고 있을까, 가슴이 답답해진다. 더 나아가 부자들의 돈 벌 자유를 무한대로 보장해 성장을 견인해야 서민들도 먹고 산다는 속 보이는 논리가 서민들 사이에서조차 여전히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때때로 확인할 때, 나는 당혹스럽다.

괜히 입을 여는 바람에 궁핍한 논리의 바닥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는 보수 논객들이야 차라리 비웃기나 쉽다. 그들이 생산한 보수 담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용감무쌍 거리에 나선 군복 입거나 머리 희끗하신, 표정 험악하신 어르신들을 보는 심경은 착잡하다. 가스통과 린치를 동원한 힘의 논리, 비논리적 우기기가 여전히 통하리라 믿는 시대 착오는 둘째 문제로 하더라도, 국가 권력에 화를 내셔야 할 분들이 국가 권력을 옹호하고 있는 모순된 풍경이 처연하기 그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쩌면 지금의 권력이 내세우는 반북친미(혹은 반노동 친자본)의 테제를 부정하는 순간, 그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기를 강요당했던 스스로의 삶의 일부 또는 전체를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는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분열증이야말로 우리 현대사가 거쳐온 모순의 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대선 직후 "이제야 세상이 바로 잡혔다"고 쾌재를 불렀을 이들이 불과 100일만에 맞게된 작금의 상황은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촛불로 뒤덮인 2008년 6월의 거리가 얼마나 경악스럽겠는가. 그들은 지금 공포에 휩싸여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코미디 무대의 주역이 되고 있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시민들의 비웃음 거리를 자처하고 있지는 않을 터이니.

공포에 휩싸인 보수 분들에게 촛불 든 시민들은 아마도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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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황당한 저주> 에드가 라이트 감독, 영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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