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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 개봉했던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 <헤어 스프레이>는 1962년 미국 볼티모어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여전히 백인 우월주의가 고정 관념이었던 시대, 트레이시(니키 브론스키)라는 앙증맞은 뚱보 백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영화는 10대 청소년 대상의 지역 쇼 프로그램을 둘러싼 왁자지껄한 소동극을 펼쳐 보인다.

뮤지컬 장르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기 짝이 없는 영화는, 그러나 꽤 경청할만한 정치적 메시지를 품고 있다. 생색 내기 식으로 일주일에 딱 하루만 흑인 청소년들의 출연을 허락해온 ‘코니 콜린스 쇼’가 인종주의적 편견 때문에 그마저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트레이시와 그녀의 흑인 친구들이 함께 거리 시위에 나선 것이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유희’의 기회를 박탈당한 흑인들이, ‘뚱보’라는 굴레를 뒤집어 쓴 백인 소녀와 손을 맞잡은 풍경은 의미심장하다. 흑인과 트레이시는 편견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에서 같은 편이다. 흑인 특유의 리드미컬한 춤사위에 대한 트레이시의 편견 없는 존중심은, 언뜻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연대의 용광로로 이끌어내는 힘이 되며, 이들이 공모한 저항의 퍼포먼스를 유희의 신명으로 고양시키는 에너지가 된다.

이들은 놀고 싶어 저항하고, 놂으로써 저항을 완성하는 것이다. 엄숙함과 차이를 강조하던 기존의 가치는 누구나 차별 없이 어우러지는 한판 난장으로 말미암아 경쾌하게 전복된다.

네덜란드 사학자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을 제창한 바 있다. 인간은 놀이를 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얘기다. 놀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의미를 내포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노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마련이다. <헤어 스프레이>를 통해 우리는, 바로 그 ‘함께 유희하는 인간’이 어떤 긍정을 만들어내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사실 <헤어 스프레이>에서 확인했던 호모 루덴스적 상황이 먼 나라 얘기는 아니다. 최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가장 극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연일 시청 앞 광장부터 광화문 네거리를 물들이고 있는 촛불의 행렬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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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집회에 나가보신 분들은 절감하겠지만, 이것은 시위라기보다 축제다. 한판의 대동제다. 가족 단위, 또는 친구와 함께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왁자지껄 떠들며 광장의 해방감을 만끽한다.

캔맥주를 치켜 올리며 건배를 외치는 넥타이 부대는 정치적 성토의 장을 길거리 회식으로 바꿔 버린다. 연주가들은 삼삼오오 멋진 선율로 축제 분위기를 돋운다. 시민들은 작은 피켓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한 재치 있는, 그러나 촌철살인의 조소를 쏟아낸다. 엄숙함이 감돌았던 예전의 시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희적 풍경들로 가득하다.

권력의 입장에서, 정치적 성토가 이처럼 축제의 형식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나오면 진압할 구실이라도 있는데, 너도 나고 웃고 떠드는 가운데 정치 권력을 향한 비웃음을 공유하는 상황에서는 딱히 어쩔 도리가 없다. 이것이 바로 유희의 힘이며, 놂의 에너지가 아닐까.

시민들은 87년 6월 항쟁의 정신에 2002년 월드컵이 안겨다 준 광장의 쾌감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촛불의 비주얼적 효과까지 얹어낸 전무후무한 ‘유희적 저항의 난장’을 세계 최초로 발명해 냈다. 그래서 2008년 6월의 시민들이, 우리들이 더 없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이것만큼 흥미진진하게 스펙터클한 영화도 없다.

여행주간지 '트래비' 최근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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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불멸의 사학도  수정/삭제  댓글쓰기

    쇠파이프 휘두르는 사람들과 야외회식하고 쓰레기 한아름 남겨놓고 가는 사람들만 없다면 정말 멋진 축제 같습니다.(물론 이분들 덕문에 비폭력을 외치는 시민들과, 전경에 둘러쌓인 상태에서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단 여러분들이 빛나는 것이겠지만요...)

    2008.06.14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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