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신구와의 수다

사람 이야기 2008. 5. 18. 10:11 Posted by cinemAgora
이미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그 이유만으로 이 배우에게 '노장'이나 '관록' 따위의 수사를 붙이는 건 왠지 온당치 않아 보인다. 그만큼 신구는 그 자체로 '배우됨'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46년 연기 생활 최초의 주연작 <방울 토마토>를 계기로 그를 만났다. 그리고 너털웃음이 선량해 보이는 이 거물에게 '신구스러움'의 정체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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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우 인생? 게으르진 않았어, 흡족하진 않지만"



최광희 (이하 '최')
<방울토마토>는 작년 초에 이미 촬영이 끝났는데 개봉이 많이 늦어졌네요.

신구(이하 '신') 잘은 모르겠는데 극장을 잡기 힘들었나봐. 블록버스터가 있을 때는 피해 가고 그런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좀 늦은 거지.

영화 보고 울었습니다. 굉장히 슬프더군요. 

아이고.(웃음) 내용은 그렇지. 객관적으로 어둡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작품이지만 일부러 그렇게 표현하려고 하지는 않았어.

너무 신파적이지 않게 보이려는 노력이 엿보이긴 했습니다.

그렇지. 적어도 걔(김향기가 연기한 다성이)가 불쌍한 애라는 걸 부각시키려 하지는 않았어.

선생님이 할아버지 역할을 했으니 신파가 될래야 될 수가 없는 작품일지도 모르죠.(웃음) 이 영화가 최초의 주연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은 앞서 주연작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신상옥 감독과 <겨울 이야기>라는 영화를 작업했었지. 내가 시아버지이고 김지숙이 며느리 역할이었어. 이 시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내용이었는데 그 작품이 완성은 됐지만 끝내 개봉은 못 했어. 그 작품 때 치매노인을 표현했지.

그 때 직접 치매 노인과 함께 생활했다고 들었습니다.

치매노인을 위한 요양소가 있던데 거긴 완전 중증 환자들이 있는 데고, 구청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곳이 있더라고. 그런 데 가서 일주일 정도 연구도 하고 촬영도 했어. 행동 같은 거 관찰하면서 그렇게 접근을 해봤지. 도움이 됐어. 신상옥 감독도 잘은 몰랐을 거야, 치매 걸린 노인에 대해서는. 같이 어울리면서 연구했었어.

선생님 정도의 경력과 연세라면 직관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 정도로 배역 연구를 하실지는 몰랐습니다.  

당연하지. 나이가 얼마가 됐든, 세상에는 수백 가지 여러 직종이 있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상대적인 일들을 다 알 수는 없는 거니까. 경험하면서, 살면서 보고 듣고 얻는 지식은 있지만 외형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니까 연구를 하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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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 토마토>, 소외된 이들의 마지막 희망을 담은 영화"

<방울토마토>에서 맡으신 할아버지는 굉장히 극빈자입니다. 이 경우엔 어떤 연구가 선행됐나요?

그렇게까지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젊었을 때는 나도 어려웠고 주위에서 그런 분들 많이 봤어. 요즘에도 철거촌에 사는 사람들 있고, 드라마에서도 봤고. 익숙한 편이지.

촬영지는 실제 철거촌이었나요?

그럼. 실제 현장을 담아야지. 완전히는 아니고 철거되기 바로 직전에 있는 곳이었어.
 
영화 속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자존심이 강하고 괴팍한 편입니다.

괴팍하다기보다는 자기 신념대로 사는 거야. 비록 폐품 주워서 살지만 남에게 손 안 벌리려고 하고. 의지가 있는 사람이지.

기존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약간 무뚝뚝하고 투박한 이미지의 연장선에 있는 듯한 인물이더군요.

그렇지.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신구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 아닐까 싶던데요?

그건 모르겠어.(웃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미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그냥 보면 다 잘 사는 것 같아도 조금만 눈을 돌리면 서울 주변에도, 뒤쪽에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 사람들은 자기 앞에 불빛이나 희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없으면 삶을 유지할 수가 없어. 그걸 바라보면 어렵더라도 걸어가면서 절망을 넘을 수 있지 않나, 그거지. '방울토마토'는 그렇게 맺어질 수 있는 열매인 거고. 그걸 얘기하고 싶은 작품이야.

감독은 배역과 관련해 선생님께 어떤 요구를 하던가요?

대본에 다 있으니까 정영배 감독이 따로 뭔가를 구체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어.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상의해서 감독 의견이 많이 반영됐고. 나를 떠올리면서 구상도 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촬영할 때 부딪히거나 할 일도 없었지.

첫 장면부터 젊은 지게꾼한테 '야 이 새끼야' 하면서 서슴없이 욕을 하시던데요. 손녀한테도 '야 이년아' 하고.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독기의 표현이겠죠?

욕하면서도 거기에 가시가 들어있는 게 아니고 단순히 습관이니까. 어쩌면 친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고. 유명한 식당의 욕쟁이 할머니들처럼. 그 양반들이 하루 종일 입에 담는 게 진짜 욕이라면 누가 그들을 찾겠어. 거기에 진심이 있고 진정이 들어있는 일종의 자기표현일 수 있지.

영화 내내 노인은 자기 감정을 거의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손녀에 대한 애정조차도 말이죠.

가슴에 묻고 사는 거지. 내가 그랬어. 다성이를 '이 불쌍한 년', 이러면 보는 사람들이 식상할 것 같다고. 당연히 불쌍한 애를 불쌍하다고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나는 걔를 나와 똑같은 인격체로 놓고 보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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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 극장안에만 머물면 감동이 아니야"


다성 역의 김향기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연기를 참 잘하던데.

요즘 향기가 학교에 가나 봐. 촬영할 때는 안 다녔는데. 그런데 그 때도 글은 알더라고. 잘 해낼까 걱정스럽기도 했었어. 향기가 <마음이>라는 영화에 출연했었는데 그거 보고 믿음이 좀 덜 갔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촬영 시작하고 보니까 잘 해내. 제법이다, 생각했어. 그걸 끝까지 해내는 거 아냐. 재능이 있는 아이라고 봐.

그러고 보면 연기도 천부적인 자질인가 봐요.

우리는 나이 들어서 힘들게 끙끙대는데, 그런 애들은 확실히 재능이 있는거지.

개봉이 많이 미뤄진데다 만만치 않은 시즌에 개봉하게 됐습니다.

그게 걱정스러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요즘은 큰 작품들이 많지 않나. 외부에서 들어온 작품들도 많고. 그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게다가 배경이 추운 한겨울이잖아. 지금 개봉하면 어떤 상관관계가 있나, 이런 것들도 걱정스럽고.

확실히 계절은 안 맞네요.

그렇지. 지금은 더운데 겨울 풍경을 보고 관객들이 시원해 할까?(웃음)

많은 관객들은 현실의 답답함을 잊으려고 영화를 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가슴이 더 답답해집니다.

그 답답한 가슴에 불편함을 하나 올려놓는 게 그들에게 카타르시스가 되어줄지 모르겠네. 나도 답답해.(웃음)

솔직히 관객들이 이런 영화를 통해 동정심을 소비해 버리고 말면 어떡하나 걱정이 있습니다. 불쌍하네, 하고 눈물 한 방울 뚝 흘리고 끝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하하 웃게만 하는, 물론 주제는 있겠지만, 그런 작품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 요는, 어둡고 밝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이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면 장르에 상관없잖나.

제가 특히 우려하는 건 극장 안에서의 감동이 일회용으로 그쳐버리고, 사회적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지는 않는 상황입니다.

극장 안에서만 그러는 건 진정한 감동이 아니지. 극장을 나가고 집에 가서도 계속 마음에 남아있는, 소통은 물론 전파력까지 있어야 감동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문밖에 나와서 잊어버리는 것은 감동이라고 할 수 없는 거니까.

최근 시트콤 <김치 치즈 스마일>에 출연하셨죠. <거침없이 하이킥>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 <거침없이 하이킥>이 워낙 큰 반향을 일으켜서 거기에 좀 가려졌어.

야동순재에 이어 선생님까지, 지금까지 전형적인 아버지 상을 연기했던 분들이 요즘에는 다소 코믹한 터치로 희화화돼서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그런 정형화된 인물로 각인돼 있었는데, 그런 사람을 조금 틀어놓고 찌그리고 해서 나오는 웃음을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그런 흐름이 언짢거나 하진 않으신지요.

그렇진 않아. 극에서 상황이 만들어져서 그렇게 가는 거니까.

거기엔 가부장의 권위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도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저마다의 생각이 다 다르겠지. 하지만 작품 상황 속에서 그렇게 설정이 돼 있는 거니까. 그것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출연을 안해야 하는 거지.(웃음)

아버지 역할을 많이 맡으셨는데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영화가 <8월의 크리스마스>와 <반칙왕> 두 작품입니다. 똑같은 아버지 역할인데도 두 캐릭터가 색깔이 완전히 다르고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두 역할 모두 '신구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웃음)

<반칙왕>에서 송강호를 보면 아버지가 그럴 수밖에 없잖아.(웃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를 보면 또 그렇고. 굉장히 꼼꼼하잖아. 그 아들 성격이 어디서 나왔겠어. 지 애비한테서 나왔겠지.(웃음)

어느쪽이 실제와 더 가까운가요?

송강호 아버지가 나랑 더 가까워.(웃음)

주어진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시나요?

배우들 각자 나름대로 방법이 있어. 내 경우에는 그 캐릭터의 출신이 뭔지, 국적이 뭔지, 어떤 환경에서 공부를 하고 성장했는지, 이런 걸 설정하면 그 속에서 뽑아지는 게 있을 게 아냐. 그게 상대와 마주칠 때 생겨나는 부딪힘을 이해하고, 그러면서 구축해나가는 거지.

물론 일상의 경험들 역시 캐릭터를 이해하는 중요한 재료가 되겠죠.

물론. 모두 도움이 돼. 만약 이조 때의 왕을 연기한다, 그러면 내가 직접 그 때를 살아본 것도 아니고. 간접 경험이라고 하잖아. 매체를 통해서 그런 경험들을 하고 잘 섞이면서 만들어지는 거야.

"나는 내 성격이 싫어..."


1962년에 연극 <소>로 연기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연극은 여전히 선생님께 연기자적 고향인가요?

연극하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다 그 생각이 내재돼 있을걸. 어제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고 왔어. 매번 연극을 해야지, 하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선뜻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을 정리를 못해. 매일 조금씩 한두 달 연습을 해서는 안 되지. 풀로 해야 돼. 그게 참 어려워. 강풀이라는 만화작가가 있더라고. 그 친구가 예전에 만화 <사랑합니다> 그걸 나보고 하자고 제안했었는데 시간을 맞춰보다가 결국 못했지. 아쉬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연극에 투여되는 에너지량도 상당할 텐데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으시겠죠.

그러니까. 더 나이 먹기 전에 해야 되는데. 정말 참여를 하고 싶은데 요즘에는 저 많은 대사를 지금 내가 소화해 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 예전에는 그런 생각 안했거든. 전에는 대사가 많을수록 즐거웠지. 그런데 지금은 물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생기는 거야. 물론, 맘먹고 하면 사람 일인데 못하겠어, 싶으면서도.
 
선생님 말씀대로 더 늦기 전에 연극 무대에서 뵙고 싶네요. 연극이든, 영화든 많은 작품을 해오셨는데 '이게 나의 대표작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계시는 건 뭔가요.

대표작? 아휴. 이제 기억력도 떨어지고 그래서 잘 모르겠어.(웃음)

영화 초창기에는 악역을 많이 하셨죠.

나, 영화 많이 안했다니까.(웃음) 많이 안했을 뿐더러 선한 역과 악역을 나눌 수 있을 정도도 아니고, 실은.

한없이 선한 역을 하시지도 않은 것 같아요. 약간 성질머리가 있다거나 하는 그런 인물들.(웃음)

그렇지.

그러다 보니 일정한 패턴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가지신 적은 없는지요.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 정형화된 역이 온 것은 아니고. 악역이나 선한 역이더라도 조금씩 틀어져서, 넓은 범주 안에서는 저마다 조금씩 다른 역을 했지. 그런 면에서는 좀 자유로웠어. 착한 아버지인데, 반은 이런 쪽이다 하면서 넘나들었으니까.

경기 고등학교를 나오시고 성균관대 국문과를 2차로 들어가셨죠.

지금은 1, 2차가 없잖아. 서울대 떨어지고 거기 갔는데. 내가 국어학자가 될 의향이 있어서 국문과에 들어간 건 아니고. 재수하려고 했는데 2학기 때 여러 가지 갈등이 생겨서 군대에 가버렸어. 그럴 땐 정말 군대가 도피처야.(웃음)

그런데 왜 대학을 중퇴해 버리셨어요.
 
내가 학자가 된다거나 이런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제대하고 이것저것 찾다보니 그랬어.

말하자면 방황을 하신 거로군요.(웃음)

요즘은 직업이 얼마나 다양해. 그러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어느 정도만 하면 생활하는 데는 지장 없을 정도 아냐. 그런데 그때는 판검사나 의사, 은행원 이게 최고였어. 그 축에는 못 끼었고.

이순재 선생은 서울대 나오시고 여운계 선생은 고려대 출신이고, 비슷한 연령대의 배우들이 학벌이 좋은 편입니다. 그때는 연기자를 딴따라라고 해서 폄하하는 분위기였을텐데 말이죠.

팔잔 걸 어떡해. 지가 좋다는데.(웃음) 내재된 욕망이나 바람은 학력과 상관없어. 공대나 의대 다니는 사람들 중에 음악을 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단지 직업으로 택하지 않았을 뿐이지.

대학 중퇴하시고 연극으로 갔을 때 주변이나 부모님께서 반대하진 않으셨는지요.

부모님 입장에서는 내가 뭐하려고 그러는지도 잘 모르셨을 거야. 밥은 먹고 사나 한심했겠지만.(웃음) 내가 외아들인데 뭘 한다고 하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불만스럽지만 도시락 싸들고 말릴 정도는 아니었어.(웃음) 그래서 내가 연기로 나갈 수 있었지. 장사라도 해서 돈 벌어 와라 이랬으면 못하지.

성장과정에서 억압이나 큰 걸림돌은 없었던 셈이군요.

그렇지. 한데 집에 돈도 많지 않고 동생도 시집 보내고 혼자 지내다가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랑 둘이 지내다가 결혼도 늦게 했어. 39살에 했으니까.

결국 결혼하신 뒤 TV와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그 때 연극만 갖고도 살 수 있었으면 연극만 했을 거야. 지금도 영화배우들 중 연극에서 충원된 사람들이 많잖아. 예나 지금이나 연극만 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어. 그때 돈을 만질 수 있는 데라야 TV, 영화 정도잖아. 그래서 그쪽 일을 했는데 이제 그쪽이 너무 바빠지니까 시간을 빼지 못하고 있지.

연기자 가운데 막역하다 싶을 정도의 동료 의식을 가진 분은 누가 계신가요?

막역하진 않아. 따로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나 즐기는 모임은 좀 있지만.

실제 성격은 어떠세요?

내 성격이라……나는 내 성격이 참 싫어. 우유부단하고 굉장히 내성적이야. 내가 생각했을 때,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할까 싶어. 아마 대본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거겠지.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남 앞에 서서 말을 잘 못해. 어눌하고. 자기표현이 불분명하고 끊고 맺는 결단력이 없어요, 내가. 다른 사람들 보면 쾌도난마라고 하나, 결단력 이런 거 보이면 부럽고. 나는 그런 걸 잘 못 해.

그런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보고 계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고쳤으면 이런 점에서 더 잘 됐을 텐데, 라거나.

그건 모르는 거잖아, 더 좋아지거나 아니면 더 나빠졌을 수도 있고. 뭘 결정하려고 하면 아래, 위로 좌우로 다 생각하는데. 그런 게 결론을 도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싫단 말이지. 신중하다고 할까 그런 면에서는 도움이 됐겠지만 내가 보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만약 내일 누가 만나자는데 지금 할 일이 이것저것 있다 쳐. 만나긴 해야 하고. 이런 일도 빨리 결정을 못 해. 그런 게 싫지. 어차피 선택은 하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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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미술가가 되고 싶어"


젊은 배우들과도 활동을 많이 하시는데 젊은 배우들 중에 짜증 나는 경우는 없으세요?

잘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 각자 공부하고 왔겠지만 그 나이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야. 자라 온 시간이나 세대 자체가 우리랑 완전히 달라. 주로 80년대 이후에 출생한 세대들. 걔네는 눈뜨면서 인터넷이나 비디오, 그림 이런 것들에 둘러싸여 자랐잖아. 우리는 세상에 전차 다니고 볼 것도 없었는데. 감성이랄까, 이런 게 굉장히 발달돼 있는 거라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연기도 그렇고. 사회 영향이 큰 것 같아.

그런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과는 별개로 연기의 깊이라든가 하는 점에서 아쉬움은 없으세요?

뮤지컬을 놓고 보자고. 춤도 춰야 되고 노래도 부르고 연기에도 빠져야 되고. 연기 하나만 갖고 되는 게 아니잖아. 심오한 연극을 할 때도 그렇고.

그렇다면 촬영현장에서 후배들의 연기에 대해 별 말씀 안하시는 편이겠네요.

그 친구들이 상의해오면 그 때 내 의견을 말할 뿐이지, 내가 감독하고 얘기해서 연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지시하거나 그렇지 않아. 그런 태도가 애들한테 관심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이미 감독하고 상의가 됐고 자기들도 충분히 공부해서 체득하고 왔는데 내가 취향에 안 맞는다고 그러면 안 되지. 선배들은 주로 타당한 얘기를 하는 거겠지만, 나는 이 친구, 저 친구에게 지시하거나 하지 않아.

선생님 연세 정도 되면 젊은 애들이 답답해 보이고, 그러진 않으신지요.

젊은 애들이 문제다, 이런 말은 공자 시대에도 있었어.(웃음), 젊으니까 시행착오도 있고 그게 미덕일 수도 있고. 고쳐가면서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나 발전 가능성이 좋다는 거야, 요즘 애들은. 뭐, 나라고 젊었을 때 잘했나.(웃음)

혹시라도 정치 분야 쪽에 대한 생각을 가진 적이 없으신지요.

없어. 원했다면 할 기회는 많았지.

그런데 왜,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정치란 일반적인 의미로 '사람을 편히 살게 하자'는 거잖아. 그런데 만날 신문이나 TV에는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넘치잖아. 그 사람들에게 가는 내 시선이 곱지가 않아.

선생님까지 그 대열에 끼고 싶지는 않다는 말씀?

물론이지. 내가 끼지 않는다고 세상이 깨끗해지고 편해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연기 외에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거나 하는 분야는 없으세요?

없어. 그런 게 있었으면 하다 못해 가게나 음식점이라도 내서 돈 벌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텐데 이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가게를 내. 그게 쉬운 일이야? 그 많은 사람들 입맛 생각해서 맞춘 다음에 내 주머니 불리게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해야 되는데 내 능력이 안 돼.

그렇다면 스스로의 연기에 대해서도 잘 만족 못하시는 편인가요?

그건 나뿐만이 아니지. 이 직종만의 얘기도 아니고. 예술이라는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럴 거야. 조각가가 자기 조각품 보면서 거기에만 빠져 있다고 생각해 봐, 다음 작품을 왜 하겠어?

그래도 예술인들은 일종의 자아도취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물론 그런 게 있기는 해야 하지만 거기에 빠져버리면 안되지. 나름의 성취감은 있어야겠지만 거기에 안주해 버리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선생님의 연기를 스스로 평가할 때 가장 답답하거나 아쉬운 부분은 무엇입니까?

연애감정 같은 거. 나는 못해봤으니까. 사랑하고 속삭이고 이런 거.(웃음) 다른 배우들은 어쩌면 저렇게 잘할까, 싶어. 멜로드라마 주인공들 있잖아. 그게 밋밋한 것 같아도 어려운 건데. 색깔 있는 역할은 바로 눈에 띄지만 그 뜨뜻미지근한 걸 처음부터 끝까지 앞에서 리드해나가야 하는 거니까.

40년 이상 연기자로 사셨습니다. 중간 결산을 해 보신다면 선생님의 연기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게으르진 않았다는 거. 작품 맡으면 성과 열을 다해서 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족할 순 없지만. 사람들한테 나, 이런 작품을 했다고 각인시킬 수 있는 작품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게 좀 아쉽고.

앞으로 만드셔야겠네요.(웃음)

내가 만약 미술가나 조각가라면 되든, 안 되든 노력해보겠는데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여럿이 하는 거라서 열심히 한다고 해도 반드시 성공하란 법도 없고.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미술가가 되고 싶어. 자기 작업에 혼자 책임질 수 있는.

합동 작업의 한계 때문에 본인의 재능이 제대로 발현이 안됐다는 말씀?

그런 뜻일 수도 있고.(웃음) 반대로 내가 참여한 탓에 작품이 잘 안됐을 수도 있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는 계속 연기를 하실 생각이시죠?

그렇지. 그렇다고 나 건강하니까 나를 써라 할 수는 없는 거잖아.(웃음)
 
앞으로 10년 정도는 더?

그건 장담할 수 없어.

워낙 건강하시잖아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기회 되면 필드 나가고. 걷는 거 좋아해. 일주일에 40킬로미터씩 걸어.

40킬로미터나?

우리 동네에 8킬로미터짜리 코스가 있어. 매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아침마다 걸으려고 해. 우리 일은 새벽에 나가야 할 때도 있잖나. 그럴 때는 오후에라도. 조깅을 했었는데 주위에서 늙은이가 왜 뛰냐고 해. 걷는 게 좋더라고. 배가 좀 나왔었는데 걷기 시작한 이후로 체지방이 줄어든 것 같아. 요새는 조깅화도 좋고. 그거 신고 하니까 확실히 걷는 데 쓰이는 근육부위가 다르더라고.

술, 담배는 안하세요?

담배는 안 해. 마흔 살에 완전히 끊었어. 끊은 지 30년 정도 됐나. 드라마 상에서 담배를 무는 게 좋겠다, 하면 물고는 있지만. 예전처럼 피려고 해도 깊이 흡입이 안 돼. 담배 냄새가 역해서. 술은 좋아.

자주 드세요?

매일.(웃음) 요즘 나이 들어서 밖에 나오면 할 일이 없어. 주위에도 술 끊은 사람들이 많아서 나와서 먹자고 하지도 않고. 집에다가 갖다놓고 매일 마셔.

주로 뭘 드십니까?

소주.(웃음) 소주만큼 좋은 게 없어. 매일 한 병씩.

건강에 안 좋지 않을까요.

요새는 소주 알코올 도수가 너무 약해졌어. 그래서 한 병 정도는 괜찮아. 한 병이 미진하다, 싶으면 조금 더 먹어.(웃음) 두 병 먹으면 다음날 부담스럽지만.

댁에서 선생님 혼자?

요즘은 저녁 식사할 때 술이 곁들여져야 음식 맛이 나는 것 같아.(웃음) 거기서 못 벗어나서 집사람이 창피해 죽겠다고 그래. 박스로 술 가져오고 빈 병 가져가고 또 새 박스 오고.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건 안드세요?

와인은 감흥이 안 와. 이게 또 무슨 맛인가 싶어. 마니아들은 많이 찾는다지만. 양주는 좀 독한 것 같아. 물 타서 마시면 별로고. 고급술은 좀 괜찮은 게 있더라만 소주가 제일 좋아. 국민주 아냐, 소주가.(웃음) 별 탈도 없어, 나는. 집사람한테 나는 열과 성을 다해서 걷는데, 술을 마시려고 걷는다고 말해.(웃음) 술이 내 체내를 순환시켜주는 것 같아.(웃음)

사진 김주영(LIFE LIFE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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