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간지 표지의 정치학

별별 이야기 2008. 5. 12. 02:18 Posted by cinemAgora
영화 주간지 표지를 보면 영화판 사정의 단면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한국영화 배우들이 표지를 잇따라 장식하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최근 영화주간지들을 보면 외국 배우들이 참 많이 나온다.

내가 7년간 몸담았던 FILM2.0만 해도 지난 3월 이후 발행된 11번의 주간지에서 한국영화 출연배우가 표지 모델로 등장한 횟수는 단 3회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비'가 한번 나오긴 했으나 그는 할리우드 영화 <스피드 레이서>의 배우 자격으로 포즈를 취한 것일 뿐이고, 나머지는 <천일의 스캔들><연의 황후><아이언 맨><인디애나 존스> <라스베거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 등의 배우들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대한민국 영화주간지의 표준'을 자처하는 씨네 21도 크게 다르지 않다. 90년대 중반 창간했을 때만 해도 고집스럽게 한국영화 배우들을 표지 인물로 내세웠던 이 잡지의 전통 역시 시나브로 사라졌다.  

이런 정황은 영화주간지에서 표지로 내세울만한 한국영화 배우가 없다는 얘기이고, 그만큼 시장에서 한국영화가 죽을 쑤고 있다는 반증으로 읽힌다. 필연적으로 대중 잡지는 독자들의 관심 방향과 시장의 트렌드를 좇을 수밖에 없으니,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과 수요를 넘어 공급 자체가 급감한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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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한국영화 사랑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이런 상황이 썩 씁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영화 매체의 존재 이유와 관련해 다른 차원의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지난주 지하철 가판대에는 쌍둥이 인디애나 존스가 나란히 걸렸다. FILM2.0과 씨네21 모두 해리슨 포드를 표지 인물로 내세운 것인데, 문제는 두 표지 모두 해리슨 포드가 입은 옷과 포즈가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다. 영화사에서 제공받은 사진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 매체가 거의 완전히 영화 자본에 포획됐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오늘날 영화 잡지의 표지는 거의 광고판과 같은 취급을 당한다. 영화사가 광고 게재를 대가로 표지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생존 자체가 절박해진 주간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인디애나 존스>는 동시에 두 잡지의 표지를 공략(?)할 경우, 노출 효과가 훨씬 클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홍보 효과는 배가됐을지 모르나, 두 주간지의 개성은 사라졌다. 독점을 향한 자본의 욕망은 늘 이렇게 다양한 개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운동하기 마련이다.

이게 어디 할리우드 영화 뿐이랴. 이번호 두 주간지에는 신작 <님은 먼 곳에> 개봉을 앞둔 이준익 감독의 인터뷰가 나란히 실렸다. 게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봉준호와 최동훈의 신작 얘기가 각각 특집과 기획으로 다뤄졌다. 두 매체의 관심사가 우연찮게도 동시에 똑같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걸까? 아니면 대한민국 영화주간지들의 편집 방향을 각 매체 편집장의 머리 위에서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영화 주간지들은 한국 영화산업의 동반자와 같은 대우를 받아 왔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와 영화 주간지들의 전성기가 병행돼 온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 매체 기자 출신 가운데는 스스로 영화판에 입문한 경우도 꽤 된다. 스스로를 광의의 '영화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난 영화 기자가 영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정치부 기자가 정치인이 아닌 이치와 같다). 그러나 그 대가로 오늘날의 영화 주간지들은 날로 위세를 더해가는 영화 자본의 홍보 대행업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취급을 당하고 있다. 동반자로서 뿐만 아니라, 비판적 견제자로서 영화 산업과의 긴장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대가다. 오타쿠적 감성을 좇다 저널리즘을 홀대한 대가다.

주간지 시장의 열악함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겉으로는 대중지를 지향하는 포즈를 취하면서 홍보 대행을 수행하고, 한편으로는 흔들리는 정체성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더욱 영화 근본주의적 도그마에 빠져 있는 게 작금의 영화 주간지들이 처해 있는 풍경이다. 대중 매체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동시대성과 사회성의 맥락을 놓친 것도 그 많던 영화주간지 독자들을 휘발시킨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나는 본다. 초창기의 씨네21에서 영화라는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던 독자들은, 극소수 문화 엘리트들만을 위한 배타적 취향의 향연장이 되다시피 한 '그들만의 리그'를 달가워하지 않게 됐다.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론을 구사해온 FILM2.0은 가격 경쟁력 하나로 처연하게 버티고 있다. 그러니 생존의 위협 앞에서 잔뜩 주눅 들어 개성과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있는 풍경이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게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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