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천박과 해학 사이

영화 이야기 2008. 5. 3. 13:17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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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음담 패설계의 수퍼 히어로, 변강쇠가 21세기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변강쇠, 우리가 알던 그 강쇠하고 어째 좀 많이 다릅니다. 게다가 그는 왜 하필 지금 다시 태어났을까요?

때는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옛날 옛적 어느 마을. 그런데 이 마을은 뭔가 이상합니다. 남자들이 항아리를 들춰 메고 다니질 않나, 여자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놀거나, 아니면 남자들이 하는 힘 쓰는 일을 합니다. 이 마을이 이렇게 된 것은 음양의 부조화로 기센 아낙네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기 때문인데요.

우리의 주인공 변강쇠는 떡 장수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사실은 이미 이대근 아저씨로 고정화된) 가루지기 전의 변강쇠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죠. 봉태규가 그 역할을 맡았으니 오죽하겠습니까. 동네 아낙들은 그를 "아래는 죽고 입만 살아 있는 강쇠"라고 놀립니다. "변강쇠는 껍딱만 남자여, 속빈 강정이라 이것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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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강쇠 캐릭터의 전복

음탕한 농담과 해학으로 유명한 가루지기전을 다시 영화로 옮긴 <가루지기>는 봉태규를 변강쇠로 캐스팅함으로써 건장한 남성성의 상징처럼 소비됐던 이대근적 캐릭터를 뒤집어 놓습니다. 남녀의 성역할이 바뀌어 있는 설정 역시, 가루지기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보려는 의도를 보여주죠.

자, 이런 가운데 아리따운 동네 처자 달갱이가 홀연히 나타나 강쇠의 마음을 사로 잡으니! 그런데, 이 처자, 난데 없이 달밤에 체조를 시작합니다. 강쇠를 홀리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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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현대적 각색

겉으로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가루지기>는 이처럼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해놓은 설정들이 도드라집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현대 무용을 선보이는 이 장면도 대표적인 사례죠.

이런 가운데 변변치 않은 변강쇠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된 사건이 벌어집니다. 위기에 처한 노승 일행의 목숨을 구해준 게 계기가 되죠. 옛 이야기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구해주면 반드시 보답이 뒤따릅니다. 노승 왈, "장승 앞의 땅 밑을 파보게, 그럼 뭔가가 있을거야." 노승이 시키는대로 땅밑을 파보는 강쇠, 진짜 술 한 병을 발견합니다. "그 병의 술을 마시게 그럼 꽃이 필걸세, 마른 고목에 꽃이 필걸세!" 굴욕의 삶을 일거에 끝장낼 수 있는 비기를 만났으니 변강쇠 눈이 뒤집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술을 마신 변강쇠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때마침 강쇠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산중에 불이 난 것입니다. 소변 줄기로 가공할만한 정력을 과장되게 묘사하는 설정, 이대근씨 주연의 추억의 영화 <변강쇠>에서도 익히 봤던 설정이죠. 그런데 이 영화의 과장도 결코 만만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졸지에 산불의 위협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환호하고. 떨어지는 바위를 날려 버리는가 하면, 폭포수의 물줄기 방향마저 바꿔 버립니다. 바야흐로 최강의 정력맨으로 부활한 변강쇠, 음담패설적 수퍼 히어로가 재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동네 처자들 변강쇠의 변화된 면모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모여듭니다. "저게 어떻게 된겨, 발로 재기를 차는 게 아니라면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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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에너지의 축제

판소리로 전해오는 가루지기전이 음탕함에 빠져 있는 호색한 변강쇠를 통해 조선 시대 말기의 성적 문란함을 해학적으로 꼬집었다면, 이 영화 <가루지기>는 오히려 사람들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집중합니다. 변강쇠와 그를 둘러싼 여인네들의 욕망을 마치 한바탕 신명나는 축제를 앞둔 설렘과도 같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죠. 변강쇠의 떡치는 소리와 여인네들의 다듬이 방망이 소리를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엮어 놓은 설정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죠. 모처럼 나타난 남정네 다운 남정네 변강쇠의 출현에 잠 못 이루는 여인네들. 달밤의 거리를 헤매는 여인들은 군무를 펼칩니다.

"줄을 서시오~!" 이제 강쇠의 집 앞은 여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강쇠의 비밀 스러운 위력을 직접 확인해보려는 거겠죠? 벼락부자, 아니 벼락 훈남으로 거듭난 변강쇠, 하루 아침에 장안의 인기 짱으로 도약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의 몸과 마음을 사로 잡으며 승승장구하던 강쇠에게도 시련은 닥칩니다.

강쇠의 운명만큼 극단적인 평가가 예상되는 영화

한국형 에로 사극의 대명사 <변강쇠>를 답습하거나 비틀며 시침 뚝 떼고 노골적인 음담패설의 장을 펼쳐 보이는 신한솔 감독의 <가루지기>는, 변강쇠를 패륜아로 몰았던 고전의 응징문학적 성격을 걷어내고,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겉으로만 근엄한 척 하는 사회적 위선에 조롱을 던지는 듯한 포즈를 취합니다. 종종 민망함의 수준이 도를 넘어서고, 지나친 남근 중심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죠. 그거야 뭐, 가루지기전을 각색한 섹시 코미디로선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쓸데 없이 진지해져 버려 가볍게 툭툭 던지는 해학의 쾌감을 스스로 갉아 먹어버린 부분에 대해선 관객들의 볼멘 소리가 나올 법 합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거늘, 스스로 '그저 성적 농담으로만 일관하는 아무 생각 없는 섹시 코미디로 보이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의 발로였을까요?

천박함과 해학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다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머문 듯한 <가루지기>. 과연 관객들의 호탕한 웃음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아니면 또 한 편의 싸구려 영화로 손가락질을 당하고 말까요? 지금으로선 후자쪽에 더 가까워 보이니 딱합니다, 그려.

##방송 원고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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