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어 윌비 블러드' 탐욕+종교=피

영화 이야기 2008. 3. 29. 19:03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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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내가 영화를 보고 나서 말을 아끼는 경우는 크게 두가지다. 우선, 말할 건더기가 없는 쓰레기 같은 영화인 경우. 이럴 땐 말하는 게 스트레스다. 2년 전의 <한반도>가 그랬다. 이 영화를 공박하는 세 차례의 칼럼을 쓰는 동안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또 하나는 너무나 압도적인 영화를 봐서 단순한 영화 소개든, 감상평이든 어떤 수사적 언어를 개발할 자신이 없거나 그런 행위 자체가 영화에 대한 모독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경우다. 2주 전에 본 <데어 윌 비 블러드>가 그랬다.

"봤다"고 하니 "어땠어?"라는 질문이 쇄도한다. 답은 하나. "죽였어!" 영화로 글쓰고 말하면서 먹고 산다는 놈이 고작 이 정도다. 도리가 없다. 이 영화를 묘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론을 즉각적으로 창안해 낸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이럴 때, 나는 깜냥도 안되는 놈이 영화판 주변에서 깝죽대고 있는 것 같은 직업적 열패감에 빠져든다. 관객으로서의 희열이 남았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을 뿐. 이 정도 엄살이라면 본 지 2주가 지난 뒤에야 겨우 <데어 윌 비 블러드> 이야기를 꺼내는 이 소심증 영화기자의 마음이 대충이나마 전달됐으려나?  

<펀치 드렁크 러브>는 못봤지만 <매그놀리아>를 봤을 때만 해도 나보다 한 살 어린 폴 토머스 앤더슨이 상당한 괴짜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 이르러 그를 영화적 천재라는 부르는 평론가들의 호들갑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몇 편의 영화를 찍은 삼십대 후반의 이 애송이 영화 감독은 <데어 윌비 블러드>를 통해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랐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에게 언감생심 '천재' 또는 '거장'이라는 칭호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마틴 스콜세지의 <갱스 오브 뉴욕>, 리들리 스콧의 <아메리칸 갱스터>, 그리고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버금가는 통찰로 미국을 규정하는 두가지 키워드, 즉 (폭력을 내재한) 아메리칸 드림과 (속됨을 내재한) 기독교를 쌍끌이로 조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탁월하게 체현한 인물 플레인뷰는 미국적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금을 캐내기 위해 땅 속 깊이 들어간 플레인뷰로부터 천천히 틸업해 서부의 메마른 민둥산을 묵묵히 응시하는 장면에서부터 영화 전편을 관통하는 감독의 태도는 예고된다. 플레인뷰, 즉 개척의 강박에 빠진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은 초라하고 처연하다. 금딱지를 캐려고 땅 밑으로 들어갔다 다리가 부러지고 만다. 사이렌 소리를 연상케 하는 불협화음이 그 초라한 시작을 장식한다.

현기증이 일어난다. 플레인뷰의 처연한 욕망이 탐욕과 저주, 그리고 기어코 모든 사람에 대한 증오로 탈바꿈해 마침내 살육의 지옥도로 걸어들어가는 과정에서, 석유 굴착 현장에서 귀 먹어 버린 플레인뷰의 아들이 느끼듯 이 먹먹한 현기증은 증폭된다. 그러니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방법론이 현기증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탐욕의 정당화를 위해 폭력과 살육이 이상하지 않은 서부의 너른 정글의 풍경은, 코를 찌르는 유전의 기름 냄새처럼 속을 매스껍게 한다. 서부극의 외로운 총잡이의 전형을 깨부순 영화의 시공간은, 오로지 살기 등등한 공기만으로 가득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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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에는 미국적 기독교를 상징하는 '엘라이(폴 다노)'가 서 있다.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듯 보이지만 그는 교회의 재정적 이익, 사실은 자신의 세속적 이익을 위해 자본주의적 탐욕과 대립하는 척 끝내 화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영악한 인물이다. 개척의 동반자이자 아메리칸 드림의 두 축, 석유를 캐내 파는 자본가와 구원이라는 무형의 상품을 파는 기독업자(구원 판매업으로서의 미국적 개신교 비즈니스는 한국에도 그대로 유입돼 온 동네에서 성업중이다)는 처음엔 진흙탕에서 싸우다 결국 손을 잡는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부정하는 척 이용함으로써 물신주의의 거대한 탑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 탑에선 악취가 풍긴다. 악취는 스크린 밖으로 뿜어져 나와 객석 사이를 흐른다. 십자군 전쟁 이래 피를 부르고 만 '탐욕과 종교의 동거'는 서부의 들판에서 그렇게 추악하게 재연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볼링 핀으로 엘라이의 대가리를 깨부숴 죽인 뒤, 플레인뷰는 마치 미완의 업무를 마치고 난 듯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집사에게 말한다. "이제 다 끝났어." 앞서 엘라이는 플레인뷰에게 돈을 얻어 내기 위해 자신의 속됨을 고백하고 만 뒤였다. "신은 거짓말이다!" 이제 그 역시 돈의 논리 앞에 성聖의 가면을 내던지고 속俗의 일원이 된다. 그러니 이 살육은 플레인뷰가 평생을 거쳐 견지해온 논리대로 방해자를 제거하는 사무의 연장일 뿐이다. 그 세계의 질서대로 그를 응징했을 뿐이다.

자본가는 형제와 아들을 가차 없이 배신하는 카인의 논리로 재산을 증식했고, 그를 아벨이라고 우겨준 대가로 부를 축적하게 된 기독교는 자본 권력에 완전히 복속됐다. <데어 윌비 블러드>는 20세기 초 서부를 배경으로 이 과정을 담담한 척 신경증적으로 담아낸 우화다. 어쩌면 감독은 이 우화를 통해 지금 기독교 근본주의를 등에 업고 중동의 오일을 탐내는 미국의 모습을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객석에 앉은 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협박적 슬로건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승자독식의 카인적 실용주의를 말하며 아벨의 미소를 짓는 CEO, 그가 지배하는 나라의 모습이 중첩된다.

조잡한 언어로 몇 마디 쓰자니 두통이 몰려 온다. 역시 이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묘사하기엔 내 두뇌 속에 담고 있는 어휘의 용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까지 깨우쳐 주니, <데어 윌비 블러드>가 왜 아니 고맙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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