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가 소비되는 방식

별별 이야기 2008. 2. 15. 13:46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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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CF는 하나의 장르이자 독립적 미디어다. 30초짜리 예술이라는 상투어를 동원하지 않다 할지라도, 누가 어떤 CF에 출연했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연예면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생활 미디어로써의 CF의 영향력은 드라마나 영화를 능가할 정도가 됐다.

사정이 이러하니 공식적으로 내건 분야에서 거의 활동 사항이 없다 할지라도 CF만 줄줄이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연예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견고하게 구축해 나갈 수 있음을, 여러 명의 'CF퀸'들이 입증한 바 있다. 전지현이 그랬고, 이나영, 김남주 등이 그랬다. 그러니 누군가 이들에게 배우라면 배우로서의 존재 증명을 해야 되지 않겠냐고 윽박지른다면, 그거야말로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CF 스타로서의 존재 증명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다. 게다가 훨씬 많은 돈을 벌어준다. 쓸데 없이 다른 장르에 도전해 연기 못한다는 소리 얻어 먹을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설령 연기력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그것대로 상품화한 이미지에 수렴돼 새로운 이미지로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는, 전혀 새로운 모델을 구축한 인물이 있다. 아니 이름이 있다. 동경과 관음의 대상이자 힐난과 시기의 대상이라는 모순적 이미지를 한꺼번에 활용하는 대표적인 경우, 미국에 패리스 힐튼이 있다면 한국에는 김태희가 있다. <중천>과 <싸움>으로 연기력 논란이 벌어져도 끄떡 없는, 우리의 진정한 CF 퀸이다.

김태희가 종전의 CF퀸들과 가장 큰 차별성을 갖는 지점은, 출연하는 광고에서 그녀의 이름 석자, '김태희'를 전면에 내거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김태희는 거의 모든 CF 속에서 30초 내러티브에 종속된 가공의 캐릭터로 등장하지 않는다. 김태희라는 이름 자체가 거대한 상품성을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가 됐다는 반증이다.

김. 태. 희.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영악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하도록 조장된 여러 미덕이 한꺼번에 자동 연상되는 이름으로 활용된다. '김태희는 예쁘다'는 미디어의 주입식 상징 조작의 힘에 의해 객관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미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그녀는, 게다가 더욱 결정적으로 서울대 출신이다. 그것은 김태희라는 기표의 상징성을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배경이 된다. 말하자면 그녀는 학벌 사회의 최고 미덕과 남성의 시각에서 대상화된 여성의 가장 큰 무기, 즉 미모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셈이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말은, 비록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녀가 똑똑하다는 가설을 기정 사실로 만든다.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라는 말이 작동하는 방식은 대체로 그렇다. 이것이 '예쁘다'와 결합하게 되니,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 말하자면 예쁜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그녀는, 스타여서 돈도 잘 번다. 김태희는, '용모단정'을 원하는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쌍거풀 수술을 해야 하거나, 점심 메뉴로 스파게티를 먹고 싶어도 김밥집으로 향해야 하는 주접스러운 고민이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언젠가 어느 준수한 재벌 2세의 프로포즈를 예약해 놓은 듯한 이름이다. 예쁜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김태희는 쓰고 싶을 때 쓰고, 게다가 야무지게 쓴다. 그녀의 미모와 우아한 위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소비라면 주저하지 않는다. 멋지게 소비하는 그녀는, 상품 사회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소비의 아이콘이자 여신으로 추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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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똑똑한 김태희'를 최근의 CF가 소비하는 방식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김태희라는 브랜드 파워를 단순 소비하는 단계를 넘어 그녀에 대한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조차 적극 활용하려는 전략이다. 디지털 카메라 올림푸스의 CF는 말미에 '김태희, 내숭 떨지마'라고 윽박지른다. 김태희를 호명함으로써 그녀의 브랜드 파워를 상기시키되, 동시에 그녀조차 남자 앞에서 내숭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하는, 평범한 욕망을 지닌 여성의 자리로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충돌한다. 여기서 조장되는 심리적 기제는 김태희라는 이름이 아닌, 그 이름을 소유한 인물에 대한 질투, 혹은 시기이다. 뭇 남성들의 흠모를 한몸에 받고 있는 예쁜 똑똑이도 사실은 내숭 떨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가상의 폭로다. 그러나 CF 안의 내러티브는 결국 그 내숭조차 그녀의 브랜드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축이자 경쟁력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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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수염차 CF도 대동소이한 방식으로 김태희를 활용한다. 외모가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여성으로서의 가격을 책정하는 시대, 성형업계가 개발해낸 새로운 전략의 일환으로, V라인 얼굴은 축복이자 특권처럼 강요된다. 그런데 CF 속에서의 김태희는 타고난 V라인을 가진 미녀로 설정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특권의 소유자다. 알지 않은가. 예쁜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그녀를 많은 남성들이 침 흘리며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광고는 부추긴다. "김태희와 경쟁하라!"고. 누가 감히 그녀와 경쟁하겠는가. 절망할 필요 없다. 옥수수 수염차가 도와준다. 국민 모두에게 V라인을 선사해줄 옥수수 수염차, 이제 이 물 마시면 당신도 김태희처럼 V라인이 될 수 있다. 옥수수 수염차는 김태희를 특권의 소유자인 귀족의 반열에 올려 놓고 '지가 뭐 얼마나 잘났다고'라는 부정적 시선을 받았다가 반사시킨다. 당신들도 (사실은 잘 난 것 하나 없는) 김태희와 경쟁할 수 있다고.

CF 속의 김태희는 소비자들을 향해, '메롱' 혀를 내밀고 있다. 나를 닮을 수 없다면 흉내라도 내보라고 부아를 돋운다. '평민인 늬들이 갖지 못한 걸 난 한꺼번에 가졌어, 그러니 잔뜩 질투해보라고. 난 벌써 이 나이에 남주 언니가 들어간 푸르지오에 갔잖아? 내 속도를 따라 올 수 있겠어? 그럼 열심히 써봐! 지갑을 열라고!'

여성 소비자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은 CF는, 관행적으로 '과시 욕망'을 부추긴다. 많은 아파트 광고들의 주인공이 여성들이며, 그 여성들이 대체로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흐믓하게 받고 있는 표정이 전시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김태희도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 이름에는 20대 동년배 여성들의 구매욕을 한껏 자극해야 하는 임무가 부여돼 있다. 그리고 김태희의 브랜드를 활용한 광고 전략은 단순한 과시를 넘어 동경과 질투라는 모순적 시선을 한꺼번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어떻게 해도 흔들리지 않는 CF적 진리는,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이유조차 그녀가 너무 잘났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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