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숭례문에 드리운 분노

별별 이야기 2008. 2. 13. 01:16 Posted by cinemAgora
격앙된 목소리로 숭례문 화재 사건의 여파를 전하는 뉴스가 택시 안에 흘러 나온다. 용의자가 69세 노인이라는 것. 살고 있던 집이 재개발 대상지가 됐는데 토지보상금으로 4억을 요구했음에도 9천만 원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듣고 있던 기사 아저씨가 대뜸 그런다. "한국에 총기 소지가 허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다들 쏴 죽이고 난리 날걸요?" 아저씨 왈, "그러면 뉴스는 신나겠네." 그와 나는 나란히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인은 분노다. 그리고 증오다. 수많은 인터넷 댓글에 어른거리는 표적을 찾지 못한 저주들이다. 하필 노인의 가슴에 똬리를 튼 분노는, 그러나 매우 정확히 국가를 겨냥했다. 따지고 보면 번지수가 잘못됐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는 마음 먹었을 것이다. 국가라는 아버지는 나를 버렸으며, 죽기전에 그를 향해 복수해야 겠다고. 조선과 대한민국의 아이콘이 하나 불탐으로써 그의 상징적 복수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600년 전통? 까고 있네, 늬들이 나한테 해준 게 뭔대? 노인은 숭례문 2층 누각에 1.5리터의 시너를 뿌리며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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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구로사와 아키라, 1950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근대 소설 '나생문'의 무대 나생문은 폐허가 될 운명의 숭례문을 닮았다. 기근으로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는 시대, 나생문의 누각에는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다. 바로 거기, 한 노파가 유령처럼 죽은 이의 머리칼을 잘라내고 있다. 정의감에 불타는 주인공은 윤리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을 따진다. 노파는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윤리가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한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아쿠타가와의 소설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 <라쇼몽>에서는 비를 피해 나생문 앞에 모인 세 남자가 숲속에서 벌어진 한 여인의 강간 사건을 두고 두 남자와 피해 여성의 엇갈린 증언을 전하며 윤리의 상대성에 대해 토론한다. 실존의 위협 앞에서, 죽음의 절박한 위기 앞에서 과연 시비지심이 발동할 수 있는지.
 
국보 1호가 불타 대한민국이 부끄럽단다. 문화재 관리가 이게 뭐냐고 뒷북들 열심히 쳐 대신다. 언제부터 그리들 나라 사랑하셨다고. 진짜 부끄러운 건 그게 아니다. 응어리진 분노를 양산해내는 징그러운 양극화 사회의 처연함이 부끄러워야 한다. 저 강남 땅에는 부동산 졸부들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땅과 아파트 시세 위에 앉아서 '억억' 하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그러고도 모자라 내 재산 지켜줄 새로운 구세주의 출현에 경배드리고 있는데, 평생 땅 파먹고 살던 누군가 '나는 이게 뭐냐'고, 울분을 삼키게 만든 세상이 부끄러운 것이다.

성장하면 복지는 따라온다는 게 새 정부의 철학이라던가. 말이 좋아 능동적 복지다. 그럴줄 뻔히 알긴 했는데 어찌 그리 한치의 오차 없이 주접을 까잡수시고 계신지. 비정규직 문제 등의 산적한 민생 현안은 인수위 국정 과제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다시 한번 21세기판 '잘 살아보세' 구호가 메아리친다.

혹자는 다들 먹고 살만해졌는데 왜들 지랄인지 모르겠다고, 콱 터뜨리고 싶은 배 두드리며 한소리 한다. 그 산처럼 부른 배를 숨기지 않고 고기 먹은 이빨이나 쑤시고 계신 추한 몰골이 지랄을 부르는 게다. 필연적으로 관계 안에서 사람일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만족감은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 측정되게 돼 있다. 쌀 없어 굶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삼겹살 깨나 먹게 됐다고, 다는 아니라는 얘기다. 양극화 문제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높디 높은 성장의 탑을 쌓아 올려 보시라. 부자는 재산을 열 배 늘리고, 빈자는 재산을 고작 1.5배 늘린 것으로 중산층입네 착각하게 되는 세상을 연출해 보시라. 언젠가 그 주춧돌 하나를 간단하게 빼 버려 성장의 바벨탑이 사상누각이었음을 입증할 노인은 둘이고 셋이고 다시 나타날 것이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아도 마리 앙뚜아네뜨의 자손들을 향한 사적 복수는 계속될 것이다. 그게 소외를 돌보지 않는, 가진 자만을 위한 경제의 잔인한 귀결이다.

타 버린 숭례문 위로, 예고된 분노와 저주의 악취가 살 타는 냄새처럼 넘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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