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안팎의 사정을 잘 모르는 분들이라면 제법 어리둥절할 수도 있는 뉴스가 최근 잇따라 전해졌다. 사단법인 한국영화감독협회가 기자회견과 성명 등을 통해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안정숙, 이하 '영진위')의 책임자들과 이른바 영화계 주류들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주장을 좀 들여다 보자. 일단 영진위가 3천억 원에 달하는 공적기금을 전횡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영진위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 전횡의 불법성을 입증할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으니 어쨌든 이 주장의 심리적 기제만을 유추해 보면 한마디로 영진위가 '지들 구미'에 맞는 단체한테만 돈을 줬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들은 명계남과 문성근 두 영화인을 '콕' 찝어 영화계를 떠나라고 촉구했다. 이유는 이렇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간 정치권력과 결탁한 몇몇 영화인들은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영화인을 타도 대상으로 몰았다"는 것. 간단하게 해석하면, 대표적인 '노빠' 영화인 두 사람이 원로들을 홀대하는 데 앞장섰다는 얘기 되겠다.

지난 10년의 문화 예술이 이념 선동의 수단?

한국영화감독협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난 10년의 문화 예술은 이념 선동의 수단으로 동원됐다"고 주장하는 한편, "파행과 갈등에서 벗어나 새 정부의 문화정책이 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염원하며 문화예술인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새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기를 기대한다"며 새 정부의 문화부 장관 인선에 대해서도 훈수를 잊지 않았다.이념 얘기가 나오니 보수 언론은 '얼씨구'로 화답했다. 2월 1일자 중앙일보는 '좌파 주도 문화예술계 다양성 되찾아야'라는 제하의 칼럼을 싣고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감독협회의 주장을 조금 거칠게 요약한다면, 지난 '10년간 해 먹은 놈들 다 쫓아내라'는 말이다. 그들 눈에 그 '해먹은 놈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나름대로 친밀한 관계를 가져온 영화인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의 영화진흥위원회 안정숙 위원장(전 씨네21 편집장)과 이현승 부위원장 등 정책과 돈(수 천 억원의 영화발전기금)을 주무르는 핵심 인물들을 일컫는다.

여기서 잠깐, 주장의 근거를 따져보기에 앞서 사단법인 한국영화감독협회라는 곳이 뭐하는 곳인지에 대한 사전 정보가 필요할 것 같다. 한국에는 감독들이 참여하는 두 개 단체가 공존한다. 앞선 주장을 펼친 사단법인 한국영화감독협회와는 별도로 이현승, 박찬욱, 김지운, 정윤철 등 비교적 젊은 감독들이 포진한 한국영화감독네트워크라는 단체가 따로 있다.

두 단체간의 차이점? 표면적으로는 평균 연령이며 내용적으로는 활동상의 격차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1월 25일 기자회견에 참석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자. 정인엽 이사장, 정진우 고문, 강대선 고문, 김호선 상임고문, 남기남 감독 등 대부분 원로 감독들이다. 동석한 정초신 감독이나 남기남 감독을 빼면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내놓은 작품이 사실상 전무(全無)한 이들이다.

이사장인 정인엽 감독은 80년대 <애마부인>과 <파리애마> 등을 연출한 바 있으나 92년 <성애의 침묵> 이후 연출 일선에서 '침묵'을 지켜왔으며, 고문을 맡은 정진우 감독 역시 95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10년이 넘게 연출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 양반은 지난 2000년 자신의 연출작 <판도라>가 영진위의 극영화제작지원 심사에서 탈락하자, '공정하지 못한 처사'라며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당시 영진위를 둘러싼 신구대립의 불씨가 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정권 교체기 틈탄 영화계 구파의 반격

몇몇 인물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이들이 왜 지금의 영진위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신구 영화인들의 해묵은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기존의 영화진흥공사를 대체해 영화진흥위원회가 설립되자 김지미 전 영화인협회 이사장 등을 앞세운 영화계 구파는 문성근, 정지영으로 대표되는 영화계 신파와 영화진흥위원회 장악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진흥위원회는 정부가 지원할 수천 억 원의 영화진흥금고를 책임지게 될 기관이었으니 어떤 세력이 장악하느냐에 따라 돈의 향방도 엇갈릴 터였다.

당시 정부는 (현재 차기 문화부 장관으로 하마평이 나돌고 있는) 유인촌 씨의 형이자 연극계 중견인 유길촌 씨를 위원장 자리에 앉혀 신구 세력의 화합을 유도했으나 앞서 언급한 극영화제작지원사업 등의 문제에 봉착하며 갈등 양상이 불거지면서 뜻대로 되지 못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며 신구 영화인들은 한국영화 페스티벌을 공동 주최하는 등 나름대로 갈등 해소를 위한 제스처를 펼쳤으나 역시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영화계 신파들은 이후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더욱 공고한 입지를 다지게 된 한편, 구파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대부분 70-80년대 왕성한 활동을 했던 구파 영화인들이 자연적인 노화에 따라 창작 활동을 하기엔 현실적인 제약이 커진데다, 대기업 위주로 재편된 영화 산업의 환경 변화에 젊은 영화인들만큼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상황도 이들의 입지를 좁히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여전히 '싹수머리 없는 후배들이 정권과 결탁해 선배들을 몰아 냈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구파 영화인들이 독재 정권 하에서 검열 등의 혹독한 영화 정책에 시달리면서도 창작 활동을 보장 받은 반면, 이들을 체제 순응적인데다 구시대적 비리의 온상으로 비판한 신파가 영화계 주류로 떠오른 이래 사실상 실업자 상태로 전락하게 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성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이들은 지금의 주류 영화인들을 '좌파'로 규정하며 이념적 공세의 대상으로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충무로의 이른바 주류 세력들은 '좌회전 깜빡이를 켜 놓고 우회전'을 하는 바람에 좌우 양측으로부터 동시에 비난을 들어야 했던 노무현 정권의 혼란스러운 정체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걸어 왔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한 평가가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권이라 부르는 것이 '좌파'의 본질을 모르는 매우 유치한 정치적 수사이듯, 지금의 주류 영화인들을 좌파로 모는 것 역시 지나친 단순화인데다 편의적인 적대시라는 얘기다.  

"영화계 주류는 좌파" 정말?

지난 10년간 영화진흥위원회는 공공재로서의 영화 다양성을 능동적으로 확보하는 것보다는, 할리우드에 대적할 한국영화의 시장 경쟁력을 높이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 왔다. 최소의 규제와 최대의 지원을 병행하는, 전형적인 정부 주도의 시장 팽창 정책을 선보여 왔다는 얘기다. 때문에 지난 두 정권의 영화 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국가주의와 시장주의의 결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대단히 '우파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스크린 독과점 등 시장 팽창에 따른 여러 부작용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시장 자율 조절론을 펼치며 대자본의 손을 들어줬으니 대관절 무슨 근거로 이들을 좌파적 성향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혹여 이들 가운데 학생운동권 출신이 많았으며 현직 영진위원장과 영상자료원장이 나란히 한겨레 신문 출신이라는 게 그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차라리 386 세대는 죄다 좌파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2MB께서도 4.19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이니 그분도 좌파인가?). 불행히도 지난 10년간 정권 언저리에 진출해 한자리씩 차지한 386들은 신자유주의의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다. 게다가 그 사이 양산된 부동산 졸부들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은인이었다(물론 그 졸부들은 단박에 은인을 좌파로 매도하고 집값 지켜줄 2MB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지만). 우파도 이런 우파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보수 언론의 시각을 내면화한 영화계 구파들이 덩달아 이들을 좌파라고 몰아 붙이는 것은, 정권 교체기를 맞아 좋았던 시절을 되돌릴 호기가 왔다는 흥분이 지나친 나머지 한참 오버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아직도 세상이 6.25 때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 분들의 시대착오적 행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민군 물러간 동네에 부역자 색출하기 위해 날뛰는 청년동맹이 연상된다면?

노무현 정권의 코드 인사에 대한 반발심이라면, 때가 너무 늦었다. 그때 강력 반발하지 않고 지금 나서는 것은 '차기 정권과 우리는 코드가 같으니 우리 중에, 혹은 우리를 긍휼히 여길 분께 한 자리 달라'고 읍소하고 있는, 또다른 해바라기처럼 보일 뿐이다. '88만 원 세대'를 쓴 우석훈 박사의 관점을 빌면, 세대간 경쟁에서 밀려난 구세대의 단말마처럼 들린다. 그러니 더 처연하다. 분명히, 지금의 위기 국면을 초래한 영화계 주류 세력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허나, 이런 방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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